[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18) ‘야망의 25시-숨기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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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오른쪽)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 1년여 전인 1986년 2월 1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77살 생일 기념 희수연과 <호암자전> 출판기념회에서 부인 박두을(왼쪽)과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1983년 <야망의 25시> 제작진에게 삼성 간부가 몰래 가져왔던 ‘호암 자서전’의 원고는 가짜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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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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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첫 기업드라마 <야망의 25시>를 제작하면서 김기팔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삼성·현대·대우 ‘3대 재벌’을 중심으로 한국 재벌들의 속살을 탐구했다. 특히 경남 의령·진주·함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각별한 인연으로 창업 초기 동업했던 삼성 이병철, 엘지 구인회, 효성 조홍제가 60년대 결별한 진짜 이유를 밝히고자 애썼다. 전자산업 선발주자였던 구인회 금성사(엘지전자 전신) 사장이 1961년 첫 국산 자동전화기(지에스-1)를 개발해 시험통화를 해보고 있다.(맨 왼쪽 사진 왼쪽), 69년 구인회와 결별하고 전자산업 경쟁에 나선 이병철(가운데 사진 오른쪽) 회장이 79년 홍진기(가운데 사진 왼쪽) 중앙일보·동양방송 사장과 79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냉장고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62년 삼성과 동업 청산을 당한 조홍제(맨 오른쪽 사진 영정)는 84년 별세 때까지 끝내 이병철을 만나지 않았다. 2004년 아들 조석래(맨 오른쪽 사진 왼쪽) 효성그룹 회장이 ‘만우 조홍제 20주기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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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 남강의 ‘솥바위’(정암)는 반경 20리 안에 세 명의 갑부가 탄생한다는 전설에다, 실제로 인근에 삼성·엘지·효성그룹 창업주의 생가가 자리해 ‘부자의 기운’을 받고자 하는 세인들 사이에 명소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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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강에 있는 정암(솥바위)을 둘러싸고 의령의 삼성 이병철 생가, 진주의 엘지 구인회 생가, 함안의 효성 조홍제 생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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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바위 전설’이 있다. 경남 의령군 남강 한가운데 커다란 가마솥 모양의 바위섬에 얽힌 전설이 구한말부터 전해지고 있다. 솥의 다리처럼 세 방향을 뻗은 바위를 보고 20리 안에 세 명의 부자가 태어날 것이며, 좋은 기운으로 부귀가 끊이지 않는다 하였다. 이 부자는 삼성 이병철·금성(훗날 엘지) 구인회·효성 조홍제, 세 창업주를 일컫는다. 지금은 소문이 퍼져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돈이 생기고, 돈이 모이고, 돈이 쓰여지는 이치에 대하여 모두들 궁금해한다.
1983년 문화방송 드라마 <야망의 25시> 제작진은 현대·삼성·대우 세 그룹에 자료를 요청했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오면서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현대는 넘치도록 앞서 가며 자료를 제공하고 현장 촬영 지원에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정주영의 배다른 형제들의 이야기, 혼외정사 스토리는 숨기고 싶어한다.
대우는 촬영 현장에 가보면 뭔가 변형이 되어 있다. 곧 알려진 일이지만, 문화방송 편성실에서 일하는 이아무개의 부인이 대우의 기획실 직원이어서, 남편이 미리 빼내준 대본을 검색해서 대비해 놓는 것이다. 대우가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창업 비화와 사채 문제다. 총수의 부인이 사채시장에서 돈을 끌어오는 드라마 장면에 예민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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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25시> 드라마 제작 때 현대그룹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촬영장을 찾아오거나 울산 현대중공업에 제작진을 모두 초청해 견학과 접대를 하는 등 가장 협조적이었다. 왼쪽 넷째가 고석만 연출, 여섯째부터 배우 최불암, 김명균 촬영감독, 배우 길용우, 심양홍 등이다. 사진 필자 고석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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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의 대우그룹은 문화방송 직원의 가족을 통해 <야망의 25시> 대본을 미리 입수해 제작진이 원하는 대로 촬영 현장을 미리 만들어놓은 ‘선제적 홍보 작전’으로 대응했다. 극 중 김우중(조경환·오른쪽 셋째) 회장이 임원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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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문화방송과 껄끄러운 관계다. 1975년 ‘박동명 사건’ 때, 문화방송 드라마 <소망>의 주인공 양정화와 박동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중앙일보>가 사회면에 실으면서, 양사는 심하게 대립했다. 문화방송은 선전포고하듯 ‘삼성 비리 시리즈’를 폭로하고 나섰다. ‘한비 사건’부터 <9시 뉴스데스크>에서 집중 보도한 뒤, 이어 일본에 둔 ‘이병철의 황태자’ 추적을 예고되자, 삼성은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도중하차한 양정화는 결국 은퇴선언, 다음으로 긴급 투입된 대타 김영애 역시 2주 방송 뒤, 공교롭게 간통 사건으로 구속되어 또 낙마한다. 신인 고두심으로 메꿨지만 드라마는 결국 2개월만에 조기종료다. 얼마 뒤 미래가 보장됐던 ‘성골’ 연출자도 퇴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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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월 외화밀반출 혐의로 신앙촌 창립자의 장남 박동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터지자, 삼성의 중앙일보는 그의 여성 편력 등을 보도하면서 당시 동양방송(TBC)의 경쟁사였던 문화방송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양정화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문제의 사진은 신인시절 우연히 찍힌 단체사진에서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이었으나, 이 때문에 양정화와 문화방송은 큰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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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문화방송 공개 2기 출신인 탤런트 양정화(사진)는 한혜숙·김자옥·박원숙 등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다. 75년 ‘박동명과 찍은 사진’을 보도한 중앙일보를 상대로 1억5천만원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기며 누명을 벗었으나 78년 끝내 연예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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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제작진과 접촉을 꺼리고 대신 작가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삼성의 홍보담당 이아무개 사장이 김기팔 작가와 서울대 문리대 동기동창이다. 의도적으로 투입되었다고 본다. 작가가 애써 거리를 둔 채 몇가지 자료를 요청하자, 삼성은 겨우 ‘한비 사건’과 ‘소비재 산업논리’를 내놓는다. 우리가 보다 궁굼해하는 것은, ‘솥바위 전설’의 주인공 이병철·조홍제·구인회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그들의 ‘결별 스토리’가 ‘경제 민주화’와 불가분의 관계라 보는 것이다. 그 진실을 그려내는 것은 <야망의 25시> 책임이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어머니(권재림)가 36살 때 낳은 막내아들이다. 경남 의령에 자란 그는 1921년 처음으로 집을 떠나, 둘째 누나가 사는 진주로 갔다. 허씨 집안으로 시집간 둘째 누나(이분시)는 그를 이발소로 데려가 긴 댕기머리를 싹둑 자르게 했다. 이병철은 “그날은 11살 때 고향을 떠난 나의 개화의 날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때까지 그는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 ‘문산정’에서 한학을 배웠던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출중하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흔히 두서너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에 나는 1년 가까이 걸렸다. 다만 유별나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
1983년 ‘야망의 25시’ 세 재벌 다른 대응
‘현대’ 넘치도록 자료 제공·촬영현장 지원
‘대우’ 미리 대본 입수해 ‘촬영 세트’ 연출
‘삼성’ 제작진 대신 김기팔 작가 접근 시도
‘삼성’ 김기팔 서울대 동창 ‘홍보임원’ 발탁
이병철·구인회·조홍제 ‘솔바위 전설’ 인연 등
이미 알려진 자료만 제공…‘결별 이유’ 감춰
작가의 또다른 대학 동창 찾아와 ‘황당 제안’
“옆사무실 일본작가 집필 ‘호암자전’ 빼내자”
실제 복사해온 초고 번역해보니 ‘조작 역력’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은 재벌 이야기 뭘까”
이병철은 1922년 진주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6개월만에 다시 서울로 전학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역사적인 인물을 만났다. 엘지 창업주 연암 구인회다. 그보다 3살이 많은 구인회는 1년 앞서 2학년으로 편입해 3학년에서 같은 반이 됐다. 구인회가 6번, 이병철이 26번이었다.
경남 함안 출신인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는 이병철의 형 이병각과 친구였다. 조홍제는 가끔 말을 타고 집에 찾아오곤해 이병철과도 편안하게 말을 주고 받는 사이였다. 조홍제는 구인회와도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이렇게 세 재벌은 일찌기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이병철이 1929년 일본 유학을 갈 때, 조홍제는 경비 500원을 선뜻 내주었다. 와세다대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귀국한 이병철은 해방 이후 1948년 조홍제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그때 정미업(군북산업)을 잘 하고 있던 조홍제는 흔쾌히 승낙하고 두 차례에 걸쳐 1000환을 투자했다. 이병철은 700환을 보태 종로2가에 무역회사 삼성물산공사를 개업했다. 외부영업과 해외수입은 부사장 조홍제가 맡고, 사장 이병철은 내부 경리를 주로 관리했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피난지 부산에서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세워, 이병철 사장·조홍제 부사장으로 사이좋게 잘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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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삼성물산 때부터 동업해온 이병철(오른쪽 맨위)과 조홍제(왼쪽부터 네번째)가 62년 2월 한국경제인협회 ‘해외 차관 도입 민간경제사절단’으로 함께 출국하고 있다. 60년 이병철의 돌연한 청산 요구에 고민하던 조홍제는 62년 9월 지분정리에 합의하고 삼성과 절연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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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병철은 갑자기 조홍제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동업청산이다. 조홍제는 황당했다. 40~50대 황금기에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일군기업을 떠나라니. 결국 두 사람은 결별에 합의했으나, 문제는 지분 정리였다. 하룻밤에 담배 5~6갑을 태울정도로 고민한 조홍제는 초기 투자금은 차치하고라도, 현재 자산에서 3분의 1정도의 지분과, 사장을 맡았던 제일제당을 원했다. 그러나 이병철이 내놓은 것은 당시 부실기업으로 은행관리를 받고 있는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에, 삼성이 갖고 있는 지분 3분이 1 가량의 주식이었다. 조홍제에게 남은 선택은 소송을 하느냐 마느냐, 하지만 결국 그는 분쟁을 포기했다.
이병철은 1968년 구인회와도 멀어졌다. 삼성의 안양골프장 파라솔 아래, 장남 이맹희도 함께 커피를 마시던 자리에서 이병철은 구인회에게 불쑥 통보했다. “우리도 앞으로 전자산업을 하려고 하네.” 10년 앞서 금성사를 세워 선풍기·냉장고·텔레비전·에어컨까지 국산화를 주도해온 구인회는 벌컥 화를 내며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 쏘아 부쳤다. 이병철은 아무말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이었다. 이듬해 1월 이병철은 삼성전자를 시작했고, 구인회는 12월 마지막 날 별세했다.’
여기까지가 삼성 홍보담당 사장이 ‘어렵게’ 건네준 내용이었다. 김기팔 작가는 자료를 검토한 뒤 몹시 불쾌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재벌의 권력화’, 결별 선언 전후의 심경이나 배경인데, 추론되는 어떤 사실도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기고 싶은 재벌의 속살은 무엇인가? 이병철은 냉철, 구인회는 소탈, 조홍제는 중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은 틀을 깨는 사고방식을, 구인회는 ‘한번 믿으면 모두 맡기는’ 경영철학을, 조홍제는 ‘속도보다는 방향’을 중시했다.
우리는 이병철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을 드라마화하기로 하였다. 이병철이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의령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던 시절, 논 한마지기에 많아야 2가마니의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는 시험삼아, 논 1마지기에 미꾸라지 1000마리를 키우고, 다른 논에는 벼를 심었다. 가을 수확해보니, 미꾸라지가 2000마리로 늘어나, 팔았더니 쌀 4가마니 값이 나왔다. 이듬해 그는 새로운 시험을 했다. 한쪽 논에는 또다시 미꾸라지 1000마리를, 다른 논에는 미꾸라지 1000마리와 천적인 메기 20마리를 같이 키웠다. 가을이 되니, 미꾸라지 논에서는 예년처럼 두배가 나왔는데, 천적 메기와 함께 키운 논에서는 무려 큰 미꾸라지 4000마리와 커다란 메기 200마리가 생산되었다. 이병철은 새로운 방식을 찾고자 할 때면 ‘미꾸라지 일화’를 꺼내곤 했다.
그즈음 김기팔 작가에게 삼성에 근무하는 구아무개라는 대학동창이 오랫만에 찾아왔다. 위원 직함으로 불린 그는 한직으로 밀려나 있다며 삼성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다. 작가와 삼성의 홍보담당 사장과 더불어 대학동창 셋이 연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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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중앙일보사에서 출간된 회고록 <호암자전>은 호암 이병철 회장의 구술을 토대로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장이 주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1930년대 후반 정미업·운수업을 하던 창업 초장기 청년 이병철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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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작가가 삼성의 자료 비협조 얘기를 한 지 얼마 뒤, 구아무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회장이 최근 일본 작가를 초빙해 자서전을 구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자기 사무실 옆방에서 쓰고 있어 엿볼 수 있단다. 집필된 원고 분량으로 봐서 결별 장면쯤 진행됐을 거라 했다. 그는 자서전을 미리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전화를 해온 그는 원고를 탈취하자고 했다. 황당한 제안에 결심을 못한 채, 어느 토요일 오후 삼성 근처 순화동의 다방에서 그를 만났다. 모두 퇴근한 뒤 회사로 들어간 그는 한참 지나 보자기에 싼 원고 한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일본어로 쓰였다. 500장이 넘는다. 그는 ‘결별 부분’이라며 50장 분량을 떼어 들더니 주변 문방구점에 가서 복사를 해왔다. 그리고 깜쪽같이 원상복구하기로 했다. 다음날, 우리는 급히 전문가를 구해 복사본을 번역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초고 수준의 거친 글에 앞뒤 문맥조차 맞지 않는 것이다. 우선 조홍제와 결별 시기가 1961년 5·16 이후로 그려졌다. 이병철이 박정희를 만나 구속된 조홍제의 구명을 요청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재산을 헌납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산 과정에서 서류정리의 철저함을 자세히 기술해놓았다.
아무리 자서전이라 하지만 철저하게 미화시키고 있다. 왜 4·19와 5·16을 착각한 것일까? 일본인 작가라서 시대를 착각했다치더라도, 조홍제를 위해 재산 헌납을? 진짜 결별 사유는 빠져 있다. 원고에는 “업종에 이견이 있었다, 아들이 사업에 참여하니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동업이란 복잡한 것이다” 뿐이다.
원고의 진위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무슨 의도로 누가 기획한 것인가? 동창생 구아무개는 무슨 역할을 한 것인가? 종합 검토했다. 조작된 원고다. 그야말로 ‘페이크 뉴스’다. 삼성에는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친구에게까지 이렇게 ‘나쁜 머리’를 잘도 쓰는데 국민대중은 어떻게 조종할까? 재벌권력의 먹구름이 무겁게 덮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정리하고, 다른 경로를 통해 투자금 규모·역할 분담·지분 배당(조홍제쪽 주장 ‘당시 평가기준액 36억환으로 삼성 재산의 절반’, 이병철쪽 주장 ‘51년 9월 결산에 따라 30%를 밑도는 미미한 수준’) 등을 보완해 녹화했다.
[%%IMAGE11%%] ‘1960년 3월, 도쿄 골프장에서 결별한 두 사람. 4·19가 터지자 일본에 체류중인 이병철을 대신해 조홍제는 “스스로 뒤집어 쓰고” 감옥 생활을 했다. 한달간이었지만 야속했다. 이병철은 5·16 때도 일본에 있었다. 박정희 쿠데타군은 이병철을 ‘부정축재 1호’로 낙인찍었다. 결국 불려들어온 이병철은 박정희와 독대해, 소급 입법으로 벌금을 물고 사재 전액을 국가에 헌납하기로 한다. 1962년 9월, 두 사람은 3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재산정리를 마쳤다. 그뒤 20여년 그들이 단 한번도 대면하지 않은 또다른 사연도 있었다. 1978년 6월 조홍제의 부인(하정옥)이 별세했을 때, 이병철이 조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형수님, 형수님 할 때는 언제인가?” 조홍제는 분통을 터트렸다. 결별 이후 호를 만우(늦게 된 바보)라 지은 조홍제는,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근의 재산보다 낫다”며 제조업으로 눈을 돌리더니 동양나일론으로 큰성공을 거둔다. 이어서 나일론에서 타이어 코드를 개발해, 한국타이어를 세계 무대에 내세운다. 효성그룹의 탄생이다.
1984년 1월16일 조홍제의 별세. 이병철은 19일 아침 출근길에 들린 빈소에서 5분 동안 머물렀다. 그는 향연에 휘감긴 고인의 미소띤 영정 앞에 무릎 꿇고 무엇인가 나직히 중얼거리듯 입술을 움직였다고 한다. 재벌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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