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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14 11:00 수정 : 2018.07.14 11:22

1979년 12월9일 방영된 <수사반장> ‘70년대 결산 시리즈 제2편 내리막길’은 <경향신문>(79년 12월8일치)에 예고 광고도 실렸다. 하지만 84년 이전 <수사반장> 방송 필름은 문화방송(MBC)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6회) ‘수사반장-70년대 결산 시리즈’
1979년 ‘수사반장’ 연말특집 5부작 기획
실제 사건들 바탕으로 ‘범죄 재구성’

72~74년 벌어진 ‘구로동 총기난사 사건’
‘공범 이종대 문도석’ 박근형·임채무 출연
‘가족동반 자살’ 비극적 결말 재연 ‘충격’
“전과자 편견이 빚은 ‘선진형 범죄’ 예고”

79년 4월 400회 기념 출연진 ‘명예경찰’
“실제 강력계 형사들처럼 승진 늦은 편”
81년 신년특집 첫 컬러방송…윤복희 출연

김상열 작가 3년간 150여편 집필 ‘혼신’
“현실성·사실성·사회성·판타지 결합 탁월”

1979년 12월9일 방영된 <수사반장> ‘70년대 결산 시리즈 제2편 내리막길’은 <경향신문>(79년 12월8일치)에 예고 광고도 실렸다. 하지만 84년 이전 <수사반장> 방송 필름은 문화방송(MBC)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고석만 연출과 김상열 작가는 1977~80년 3년 남짓 동안 <수사반장>을 통해 ‘범인 잡기’보다는 ‘범죄 동기 찾기’에 초점을 맞춰 군사독재와 산업화 속에서 암울해져가는 사회상을 조명하고자 했다. 79년 12월 연말 특집으로 기획한 ‘70년대 결산 시리즈’ 5부작이 대표적이다. 72~74년에 걸쳐 벌어졌던 ‘구로동 카빈 강도 사건’을 다룬 ‘제2편―내리막길’은 총기 사용, 연쇄살인, 가족 인질 동반자살 등 이른바 ‘선진국형 범죄’의 예고편으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내리막길’에서 범인으로 당대 ‘꽃미남’ 탤런트로 꼽히던 박근형(이종대 역·왼쪽)·임채무(문도석 역·오른쪽)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로동 카빈 강도 사건’. 1972~74년 3년에 걸쳐 서울 구로동 일대에서 벌어진 연쇄 총기난사 사건이다. <수사반장>에서 ‘이종대·문도석 사건’(박근형·임채무 출연)으로 방송되어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그 뒤 김상열 작가는 희곡으로 각색해 <등신과 머저리>(원제 그대의 말일 뿐)로 무대에 올렸다. 이장호 감독은 영화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로 만들어 흥행을 거두기도 했다. 한 시대의 풍속도가 됐다.

‘이종대·문도석은 교도소 동기였다. 그들은 교도소를 출소한 뒤,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생활고가 지속되자 범행을 모의한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예비군 무기고를 포착하고 세심하게 관찰한 뒤, 군용 ‘M2’ 카빈 소총 3정을 훔친다. 첫번째 사건 보고는 이렇다. ‘1973년 8월25일 오전 11시35분께 구로동의 제1수출공업단지에 있는 한 회사의 정문 앞 도로에서 검은색 코티나 승용차를 탄 20대 후반의 청년이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으로 직원들의 봉급을 찾아오던 회사 경리직원의 복부에 총을 쏴 살해하고, 375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문도석의 실수였다. 총으로 위협만 하기로 모의했으나 직원이 강력하게 반항하며 달려들자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로써 두 사람, 이종대·문도석의 도주행각은 시작된다. 이날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차량이 같은 날 밤 서울 성산동 골목길에서 발견되면서, 범죄의 대담성과 수법의 유사성으로 미루어볼 때 구로동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은 1972년 9월12일 발생한 ‘이정수 납치 사건’과 동일범으로 추정되었다.’

1972~74년 3년에 걸쳐 연쇄 살인을 저지른 ‘구로동 카빈 강도 사건’의 주범 이종대(왼쪽)와 문도석(오른쪽)은 안양교도소 동기로,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냉대의 희생양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작가 김상열은 1979년 연말 <수사반장>에서 ‘이종대 문도석 사건’을 다룬 데 이어 80년 상임연출을 맡고 있던 극단 현대극장에서 <그대의 말일 뿐>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심의에 걸려 쓰지 못했던 희곡의 원제 <등신과 머저리>로 지금도 종종 공연되고 있다. 연극배우 기정수(왼쪽)·최주봉(오른쪽)이 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사진 김상열연극사랑 제공

<수사반장>의 형사들이 전방위로 나선다. ‘이정수 납치 사건’은 국민은행 아현동지점에서 돈을 찾아 나오던 이정수를 경찰 전투복 차림의 30대 청년 2명이 코티나 차량으로 납치한 사건으로, 납치 5분 뒤 공덕동 부근에서 4발의 총성이 울렸고 차 뒷좌석에서 싸우는 장면을 보았다는 제보만 있는 채로 그때까지 범인을 찾지 못한 미결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당일이 마침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적십자회담 대표단 일행이 서울을 방문한 날이어서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모두 거기에 쏠려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치밀하고 대담한 범죄였으나, 사건 5일이 지난 뒤에야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사회면 귀퉁이에 실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사이 이종대와 문도석은 3차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택시운전사가 총기 소지를 눈치채자, 기사를 살해하는 범행을 추가로 저지른다. 결국 구로동 총기난사 사건은 범인의 자살로 막을 내린다. 74년 7월25일, 문도석(33)이 개봉동 주택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과 같은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으로 여섯살 된 아들을 먼저 죽이고 그 역시 이마에 총을 쏴 자살했다. 공범 이종대(40)는 동반자살하자는 문도석의 요구를 거절하고 가족과 함께 도주하다가, 인천 주안동에 있는 자신의 전셋집에서 수사반장과 대치했다. 그는 대치 상황에서 총기를 획득한 경로와, 납치한 이정수의 살해 경위 그리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 심경을 토로했다. 원래 구로공단에서 다시 한번 범행을 하려고 차량을 물색하던 중 경찰 검문을 당했다. 지난 범행 때 문도석의 실수로 경리 직원을 살해하며 총소리를 내어, 주변에 인상착의가 노출되었다. 이로부터 행적이 추적당해 쫓기기 시작했다. 오늘 불심검문에 포착되자 당황하여 도주하며 그들은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대치 17시간 만인 7월26일 오후 8시, 그는 아내와 네살·두살 된 아들을 먼저 죽인 뒤 결국 카빈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국내 첫 권총 강도 사건으로 기록된 ‘구로동 카빈 난사 사건’은 1974년 7월26일 문도석에 이은 이종대의 가족동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한국일보>(74년 7월27일치) 기사. 사진 ‘고경태-아버지(고봉성 목사)의 스크랩’ 중에서.

<수사반장>은 이 처참한 일가족 자살 장면을 그려내기 위해 고민했다. 지금 같으면 여러가지 극적 효과도 발휘하고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 시절의 궁여지책이 나왔다. 박근형과 김윤경 그리고 어린아이 두명의 다정한 사진 한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가, 액자에 총알이 난자하는 장면이 총소리와 함께 연출되었다. 실제 총을 쏘았다. 효과적이었다. 십여년이 지난 뒤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시청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영상의 기억’이란 무섭다.

1970년대 전반 ‘구로동 총기난사 사건’은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만들어낸 시대적 범죄였다. ‘이종대·문도석 사건’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총기와 차량을 동원하였고, 치밀성·대담성·기동성·반복성을 갖춘 이른바 ‘선진형 범죄’로 기록되었다. 암울한 시대의 예고편이었다.

김상열 작가, 그는 작품의 영역이 광범위할 뿐 아니라 그 사상적 면모 또한 가볍지 않다. 그의 연극을 포함한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수사반장>과 같이 가는 길은 명료했다. <수사반장>은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으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작품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선진형 범죄’는 유신시대와 10·26을 거치면서, 산업화와 배금사상이 횡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능형으로 치닫고 있었다.

1979년 12월 <수사반장> ‘70년대 결산 시리즈’ 가운데 암달러상 살인사건을 소재로 기생관광 문제를 다룬 ‘제1편-달러’ 촬영지인 경주 불국사 앞에서 제작진과 출연진이 함께 했다. 맨뒷줄 왼쪽 고석만 연출, 둘째 줄 왼쪽부터 조경환·오미연·최불암·김용선·이묵원·임문수·경주 지역 형사·정치조(촬영), 첫째 줄 왼쪽부터 박병훈·길용우·송일권·김상순. 사진 고석만 제공
우리는 뜻을 모아 ‘70년대 결산 시리즈’를 기획했다. 1979년 12월2일부터 12월30일까지, ‘12·12 쿠데타’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연말을 정리하며 방송되었다. ‘제1편―달러’, 70~71년 시작된 일본인 기생관광 붐,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 늘어난 근친상간의 시대, ‘송미장여관 암달러상 살해 사건’과 ‘현지처 증발 사건’을 복합구성했다. ‘제2편―내리막길’, 구로동 카빈 강도 사건을 소재로, 각박해진 도시의 사회상을 가감 없이 고발했다. ‘제3편―시간의 씨앗들’, 수출 증대와 제1차 오일쇼크에 따른 물가고와 밀수범의 범람, 늘어난 경제사범을 통해 72~73년의 사회현상을 그렸다. ‘제4편―엄마의 손’, 경제적 풍요 속에서 싹트는 상류층 부인들의 탈선과 부동산 투기 및 도피성 이민 등 돈의 유희를 풍자한 74~75년의 사회현상을 다루었다. ‘제5편―2×3=6’, 효주양 납치 사건을 비롯해 송도 토막살인 사건, 고교생 연쇄강도 사건 등이 사회를 흔들고 있던 79년 6월, 청주보육원에서 의문의 실종 사건이 벌어진다. 지적장애아를 유기해 보상금을 갈취하려 했던 ‘청주보육원 정박아 암매장 사건’이 7살 어린아이의 시선에 잡힌다. 지적장애 어린이는 기진한 몸으로 벽에 ‘2×3=6’을 새긴다. 두명씩 세차례, 합해서 여섯명을 유기했다는 ‘암호’다. 그 낙서를 단서로 사건은 세상에 드러난다. ‘수사반장’ 최불암이, 죽어가는 그 어린이를 안고 바람 부는 들판을 울면서 뛰다가 스톱모션된다. 그 장면은 <수사반장> 타이틀백의 엔딩컷으로 내내 박혀 있었다.

1979년 12월 <수사반장> ‘70년대 결산 시리즈’ 가운데 청주보육원 지적장애아 암매장 사건을 다룬 ‘제5편―2×3=6’의 마지막 장면. ‘박 반장’(최불암)이 죽어가는 어린이를 안고 달리는 모습으로, 이후 내내 타이틀백의 엔딩컷으로 쓰였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치안본부는 1979년 4월 400회 특집 기념으로 우리 형사들에게 명예경찰 대우를 해줬다. 명예경장·명예경감·명예경정. 우리들의 열정과 애정에 비하면 승진 속도가 늦다. <수사반장>을 도와주던 실제 경찰 최중락·신가희도 승진이 늦다. 경찰에서 사건 현장을 뛰는 강력계 형사들은 승진 기회가 적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신 재벌이나 전직 대통령 같은 거악을 척결하는 ‘칼잡이’로 불리는 특수부 형사, 치안본부나 내무부 같은 상급기관에서 인사나 행정업무를 하는 기획경찰, 시국사건을 다루는 공안, 요즘엔 금융조세 분야가 승진 기회가 많아 인기가 있다고 한다. 형사들이 국민을 대면하고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리라는 일반적인 기대가 깨져갔다.

<수사반장>은 2006년 문화방송 창사 45돌 ‘다시 보고 싶은 프로그램 1위’로 뽑혔다. ‘박 반장’의 실제 모델로 드라마 제작 자문을 맡았던 죄중락(2017년 작고) 총경은 2007년 정년퇴임하면서 회고록 <우리들의 영원한 수사반장>을 펴내 출연 배우들과 동고동락한 추억을 되새기기도 했다.

<검사내전>(2018년, 부키 펴냄)의 저자 ‘생활형 검사’ 김웅은 “검사는 다른 인생의 찢어진 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꿰매는 직분이다”라고 했다. 어느 조직이든 전선에서 떨어질수록, 총구에서 멀어질수록 승진과 보직의 기회가 많다. 현장 나가는 형사는 게임으로 비유하면 끝판왕은 만날 일 없이 마을 주변의 독개구리나 좀비 따위를 잡는 ‘노가다’다. 좀비 따위 100마리 잡아봐야 중간보스 한마리 잡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사건 현장의 형사는 좀체 레벨업을 하기 어렵고 사실상 끝판왕을 만날 기회도 없다.

현업에 몰입하는 연출자 또한 승진 기회가 늦다. 방송사 사원주택 공모 때도 바빠서 신청을 못해 집에서 무능한 가장으로 취급받았다. 더구나 정치물이나 사회물을 만들고 있으면 회사의 대외적 균형축 역할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사 큰 물결도 보고,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밑바닥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공부 세상공부를 하기엔 참 좋은 일이긴 하다. <수사반장>의 현실 인식과 현장 포착 안목은 적중했다.

‘엘리베이터걸 실종 사건’, 그 여자의 새벽 근무지 이탈로 불거진 사건은 집중적인 주변 탐문에도 불구하고 흔적을 못 찾는다. 온갖 억측과 추리가 난무한 뒤, 엘리베이터라는 새로운 기계체에 착안하여 전체를 분해하듯 검색한 끝에 엘리베이터실 바닥에 널브러진 주검을 발견한다. 역추적해보니, 새벽 잠결에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 허공에 떨어진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은 자동으로 닫히고, 그 여자는 산업화 속에서 실종된 셈이다. ‘귀뚜라미 소리’, 미궁에 빠진 사건을 추적하던 중 벽 속에서 울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찾아 벽을 허물기에 이르고, 벽 속에 갇힌 시신과 그가 차고 있는 알람시계의 귀뚜라미가 사건을 해결한다. 이 또한 현대문명의 아이러니를 본다. ‘여우와 늑대’, 카바레에서 만난 ‘제비’와 ‘꽃뱀’이 벌이는 고도의 심리전. 스톱모션을 통한 내면의 소리가 일품이다. 타락한 성문화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1981년 신년 특집 ‘바다로 간 얼간이’는 <수사반장> 첫 컬러 방송으로, 경포대 해돋이로부터 환상적인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가수 윤복희가 출연하고 뮤지컬적 요소가 가득 담긴 드라마였다. 앞서 80년 12월 신년 특집 촬영 때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대부대가 부산에 내려와 이틀째 촬영 70%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급한 전갈이 와 있다. “다음주(12월22일) 방송부터 컬러로 전환되니 모두 컬러로 다시 찍어라. 컬러 필름은 들려 보냈다.” 대한민국 텔레비전의 컬러 방송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80년 말, 한 국가의 ‘색채’에 대한 기본 철학과 인식 수준이 이 모양이라면, 이 정권의 문화 수준을 미루어 짐작하고 남는다.

1810년 유럽의 대문호 괴테가 <색채론>을 펴내어 미술계에 지진을 일으켰다. 괴테는 풍요시대에 어린이 색채철학을 강조했다. 색채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만남, 그리고 그 경계선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으로 인식해, 눈 속에 일종의 빛이 있어서 내부 혹은 외부로부터 미세한 자극이 주어지면 색채가 촉발된다고 생각하는 혁명적 이론이다.

괴테의 <색채론>을 다시 찾아봤다. “태양은 안개 낀 날에는 노란 원반으로 보인다. 중심부는 밝은 노란색이며, 가장자리는 붉은색을 띤다. 아침저녁에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짙은 안개에 쌓인 태양은 붉은 색조로 나타난다. 태양이 떠오를수록, 점점 더 밝은 노란색으로 빛난다.” 이 ‘색채론’을 적용한 계몽주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죽음을 부르는 ‘베르테르 현상’을 낳았다.

작가 김상열은 1980년 말까지 3년 남짓 150편의 <수사반장>을 혼신을 다해 집필했다. 그는 뉴욕 장기 연수에서 돌아온 80년대 후반 다시 한번 고석만 연출과 호흡을 맞춰 여러 작품을 했다. 사진 김상열연극사랑 제공

김상열 작가, 특이할 만큼 그의 작품에는 ‘죽음’이라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그것도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살인은 살인을 불러오고 연쇄살인으로 발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상열의 생애 자체가 ‘죽음’과 맞선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에게 죽음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 삶을 위협하는 형태로 다가왔고, 그의 작품은 죽음을 자각하고, 죽음을 비판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행위였다. 이 죽음의 문제는 초기 희곡뿐 아니라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줄곧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와 사상의 변모 과정을 살펴볼 일이다. 6·25 적치하 90일 핏빛의 경험, 외삼촌의 죽음, 젊은 아버지의 횡사 그리고 누나의 자살은 인생의 질곡이었다. 김상열은 평생 꾸준한 창작활동으로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의 대면을 극복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죽음 안에 무한히 많은 희망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세상에서 겪는 육체적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며, 진정한 죽음은 절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김상열은 80년 말까지 3년 남짓 150편의 <수사반장>을 잘 쓰고 홀연히 미국 뉴욕을 향해 장기 연수를 떠났다. 김상열의 <수사반장>은 현실성과 사실성, 사회성과 판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사반장>은 1971년 3월부터 84년 10월까지 1차, 85년 5월부터 89년 10월까지 2차에 걸쳐 880회 방영됐다. ‘박 반장’ 최불암만 남기고 ‘형사 4인방’은 별세했다. 김호정(1978년 작고) 후임인 남성훈(2002년 작고)·김상순(2015년 작고)·조경환(2012년 작고)이 83년 한 제약회사 티브이 광고에 함께 출연했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시대 <수사반장>에 혼신을 바치고 먼저 떠난 열정의 형사들, 그 이름을 불러본다. 김호정, 김상순, 조경환, 남성훈 그리고 작가 김상열.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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