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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28 11:00 수정 : 2018.07.28 15:40

1982년 고석만 연출은 김기팔 작가와 함께 ‘서민영웅 발굴’에 나섰다. 3·1절 특집극으로 방영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이 첫 작품이었다. 구한말 13도 의병대장 가운데 유일한 서민 출신이었던 ‘신돌석’에는 “탤런트실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녀석, 절대 인사 않는 녀석 있잖아. 뚱뚱하고, 대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나영진이 발탁됐다. 문화방송 제공

1982년 김기팔 작가와 ‘서민영웅’ 발굴
3·1절 특집극 ‘구한말 의병장군 신돌석’
“대사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그 녀석”
김 작가 직접 ‘우직한’ 나영진 주연 낙점

경북 영덕 부곡리 생가부터 찾아 ‘조사’
1896년 갑오농민혁명 때 1차 의병 출정
1907년 13도창의군 첫 서민 출신 대장
일본군도 두려워한 ‘신출귀몰’ 활약상

서울~영덕 무박2일 31시간 현장 촬영
수백명 보조출연자 이끌고 ‘5회 왕복’

2차 기병한 뒤 1908년 부하 손에 ‘살해’
실제 순국 자리 ‘최후 촬영’ 모골 송연

1982년 고석만 연출은 김기팔 작가와 함께 ‘서민영웅 발굴’에 나섰다. 3·1절 특집극으로 방영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이 첫 작품이었다. 구한말 13도 의병대장 가운데 유일한 서민 출신이었던 ‘신돌석’에는 “탤런트실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녀석, 절대 인사 않는 녀석 있잖아. 뚱뚱하고, 대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나영진이 발탁됐다. 문화방송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8회) ‘발굴, 서민영웅-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70년 <문화방송> 공채 탤런트 4기로 데뷔해 12년만에 첫 주연으로 발탁된 나영진은 ‘말술을 마시는 장사에 신출귀몰 용맹했다’는 구전만 남아 있는 구한말 서민 출신 의병대장 신돌석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문화방송 제공

1982년 초 신돌석(申乭石)을 찾아 나섰다. 경북 영덕까지, 서민 출신 의병장에게 이끌려 긴 시간을 달렸다. 신돌석, 그는 신출귀몰했고, 축지법을 쓰듯 산을 내달렸으며, 항아리 말술을 마셨다고 전해져 온다. 역사는 승리자의 붓끝에서 기록된다. 그는 서민이고, 붓도 없다. 다만 애국의 일념으로 태백산 준령을 누비고 다니며 일본군을 쳐부쉈으며 계급을 타파했다. 그의 기개를 후대에 전해야 했다. 우선 그의 출생지부터 찾아가봤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 복원해놓은 신돌석 의병장군의 생가. 신돌석 유적지는 1999년에야 영덕군에 의해 조성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영덕군이 신돌석 장군의 생가 인근에 조성해놓은 기념관 내 사당 충의사에 걸려 있는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의 초상화. <한겨레> 자료사진
신돌석은 1878년 11월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현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이필제 난’의 중심지였다. 이필제 난은 1870년부터 약 1년 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삼남민란 이후 일어난 최대의 반봉건 농민운동이었다. 따라서 신돌석은 태어나면서부터 반봉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돌석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 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이 시대에 와서 신돌석의 가문은 서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하니 반봉건 의식이 남달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1800년대 후반 조선은 강대국 이권 싸움에 휘말렸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들불처럼 일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진 그때, 신돌석은 1896년 18살의 나이에 민족적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차 기병이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의진이 경주를 거쳐 그해 7월초 영덕 방면으로 이동해 오자 이들과 연합작전을 벌였다. 즉 7월5일 신돌석의 영해의진은 김하락의진과 연합하고, 7월9일 유시연의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 연합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 관아를 공격해 계획을 달성하고, 다음 계획을 수립한 뒤 7월14일 영덕에 도착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일본 군사 수백명이 일시에 기습하자 신돌석과 김하락은 연합 대항하여 남천숲에서 격전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김하락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오십천 강물에 투신해 순국하고 말았다. 이에 신돌석을 비롯한 의병들은 역량을 키우기 위한 단련에 돌입하는 한편, 뜻을 같이하는 지사들과 연대하게 된다. 1906년 2차 기병 때에는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이끌었던 박상진, 전기 의병 당시 유인석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원주 진위대 장병들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했던 민긍호 등이 합세했다. 신돌석 부대는 먼저 영해 부근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한 뒤, 다시 울진으로 출정해 장흥관에 정박 중인 일본 선박 9척을 격침했다.

초반부 이야기만으로도 ‘3·1절 특집극’의 화면은 차고 넘쳤다. 우리의 ‘서민영웅 발굴’은,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김기팔 작가는 드라마의 골격을 세우며 곧 주인공 물색에 들어갔다. “탤런트실 로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녀석, 절대 인사 않는 녀석 있잖아. 뚱뚱하고, 대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그러면 다 안다. 나영진, <문화방송>(MBC) 탤런트 4기생. 잘생겼다기보다는 우직해 보이는 나영진이 낙점되었다. 지금부터 나영진은 ‘신돌석 장군’으로 변신해야 한다. 그러나 나영진에게 대본 이상의 자료는 필요 없다. 그는 대본을 기조로 연출자와 간결한 캐릭터 설정만 하면 백지에 물감 붓듯 새 인물을 창출해내는 기능적인 배우다. 곧 드라마 촬영에 돌입했다. 해설은 자기만의 소리를 구사하는 ‘성우 귀재’ 최응찬이 맡았다. 그즈음 최고 인기 ‘형사 콜롬보’보다 더 경쾌하게 읽어나갈 것이다.

신돌석의 소년기는 압축적으로 넘어가고, 의병을 일으키던 기상, 김하락과 합류, 그의 순국을 목도하며 더 분발한 기개, 박상진·이강년·민긍호와의 연대, 울진 장흥관 일본 선박 격침까지를 속도감 있게 전개한 뒤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돌석의 활약은 전국으로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이후 신돌석은 삼척·양양·강릉·간성 등 동해안 일대, 영양·청송·의성·봉화 등 경북 내륙지방, 정선·원주 등 강원 내륙지방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 일본군은 ‘신돌석’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태백산 줄기를 누비고 다녀 ‘태백산 호랑이’가 되었다.

1982년 3·1절 특집극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양반유생 출신과 달리 근대사에서 묻혀 있던 서민 출신 의병대장을 처음으로 발굴해 알렸다. 사진은 2008년 6월12일 영덕군에서 열린 신돌석 의병장군 탄신 100주년 기념 ‘영릉(영덕·강릉)의병진 출정식 재현’ 행렬. <한겨레> 자료사진
신돌석의 의병은 1906년 가을 들어 경북 일월산·백암산·대둔산·동대산 등지로 남하한다. 11월11일 문경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대하여 순흥을 공략한 뒤, 그 소식을 듣고 대구로부터 일본군 지원부대가 진격해 오자 울진으로 퇴각하는 듯하다 일망타진하는 쾌거를 거둔다. 내 땅을 나만큼 아는 자 누구인가. 실로 자연지세를 이용한 신돌석의 신출귀몰은 일본군은 물론 유생 의병들도 따를 자가 없었다. 태백산 줄기에 널린 야생화처럼, 이름 모를 서민 의병들은 몸짓 자체가 감동이었다. 이듬해 봄에도 신돌석은 중군장 백남수와 김치현 등 용맹한 휘하 장병들과 함께 영덕 일대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일진회 등 친일세력들을 대거 처단하여 그 기세를 더욱 높였다.

신돌석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부근의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웠다. 자연스럽고 진실하며 애국충정을 토하는 그의 격문은 사람들을 격동했다.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농민을 드라마에 녹여냈다.

신돌석의 활약은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중앙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의 강제해산에 따른 해산 군인들의 의병 합류와 상승 작용을 하면서 유림 중심의 의병운동을 국민전쟁으로 확대·발전시키는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다.

신돌석은 1907~08년 전국 의병 연합부대인 13도창의군의 영남 대표인 교남창의대장으로 활약했다. 유일한 서민 출신 대장이었다. 자료 독립기념관 제공
서민의 신분이었지만 신돌석은 그해 11월 이인영·허위·이강년 등 양반 유림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의 연합부대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할 때,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최익현 등 유림이 주재하는 ‘최고회의’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신분 차별에 심히 분개한 신돌석은 ‘체제가 굴절되는 첫 발단은 지식인 책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돌석은 독립하자는 서민들의 거대한 외침으로 포위되었다.

1896년 18살 때 1차 봉기했던 의병장 신돌석은 1905년 울진 해변의 월송정에 올라 을사늑약으로 패망해가는 대한제국의 현실을 탄식하는 시를 남겼다. 영덕군은 신돌석 장군 유적지 입구에 시비를 세워 놓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앞서 1905년 평해(울진) 월송정에서 읊은 시에 그의 의연함이 묻어난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 잊고/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남아 스물일곱살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촬영은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진행했다. 1906년 신돌석의 두번째 기병 때 전답을 팔아 지원했던 아버지 신석주(최남현)는 평소에도 새벽에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와 조반을 먹는 사람이었다 한다. 안개 낀 새벽 산을 찍으려면 서울에서 자정에 출발해 5시까지 경북 영덕에 도착해야 한다. 의상 소품을 챙겨 떠나려면 밤 9시쯤엔 작업이 시작되어야 하는데도 일당은 자정부터 계산된다.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일정 부대는 앞산을 오르게 하고 또 다른 부대는 옆산을 오르게 한 뒤, 산어귀 장면과 동네 원경은 밑에서 동시에 촬영한다. 새벽 안개 속에서 앞산을 오르는 팔십 고령 최남현을 찍는다. 늦어도 아침 7시까지는 마쳐야 한다. 마을 어귀의 장면들은 9시쯤에 끝난다. 그때 먹는 아침 도시락은 쓴맛이다. 오전 10시쯤엔 앞서 출발한 보조출연자들이 산 정상에 올랐다. 약속된 시각에 횃불(봉화)이 오르면 산과 함께 횃불이 잡히고, 카메라가 천천히 돌아 옆산 정상에 다다르면 신호 봉화가 오른다. 신돌석의 신출귀몰, 신돌석의 유격 장면은 이런 식으로 찍었다. 산에 올랐던 보조출연자들이 내려오는 동안 마을 장면은 계속된다. 그사이 마을 주민에게 미리 주문한 걸쭉한 국물과 뜨거운 밥 한그릇이 마련된다. 모두 모여 맛있게 먹는 점심은 오후 3시를 넘길 때다. 이 모두 제작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에는 의병 전투 장면이 필수적이어서 보조출연자들이 유독 많이 등장했다. 특히 서울~영덕 무박2일 촬영 강행군으로 출연진과 제작진의 고생이 심했다. 1982년 문화방송 보조출연자 대기실의 모습. 엠비시 가이드 제공
그러나 신돌석의 신출귀몰을 그려나갈 때 현실인 듯 기쁘고 힘이 솟아났다. 낮 장면은 밤까지 계속된다. 노출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찍는다. 완전 어두워진 뒤에야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도중 휴게소에 들러 가락국수라도 먹게 하는데, 기사를 빼곤 모두 깊은 잠에 ‘꼬꾸라’졌다. 되도록 자정 전까지 방송사에 도착해 해산을 선포해야 한다. 마침내 집에 들어가면 새벽 2시께. 오고 가고 꼬박 31시간이 넘는 작업이다. 보조출연자들과 스태프의 일당은 야간수당을 포함해 10만원이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특집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이런 일정을 5회 이상 거쳐야 했다. 이 시대의 특집드라마는 무엇인가? 한 방송사의 균형축 구실을 누군가 해야 한다. 긴 세월 동안 좀 더 간편한 수많은 방식을 놔두고 혼자만 이렇게 험난한 길을 찾아나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장강의 앞물결은커녕 샛강도 되기 전에 쓸쓸히 밀려난 ‘형님(연출가) 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날밤을 새웠다.

1908년 2월 일본군은 공식 보고서에 “신돌석의 신출귀몰이 실로 자유자재하여 용이하게 체포할 수 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신돌석 의병부대에 대한 무력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제는 회유 공작을 편다. 일제는 경북관찰사의 서약서와 통감의 편지를 보내 신돌석에게 귀순을 권유했지만, 권유서는 그 자리에서 불살라지고 신명이 다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천명하여, 따르는 의병들의 사기만 드높인다.

[%%IMAGE11%%] [%%IMAGE12%%]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1908년 9월 영해 희암에서, 10월 영양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다. 그리고 영해와 평해를 중심으로 흥안·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와 안동·영양 등 경북 내륙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계속한다. 눈부셨다. 이어 겨울이 다가오자 신돌석은 전력 손실을 보충해 다음해 봄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했다.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연히 옛 부하 김상렬을 만나 그의 집에 묵는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 등과 함께 신돌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시킨 뒤, 깊은 잠에 빠진 그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그들 삼형제는 신돌석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1908년 11월18일 서민장군 신돌석은 31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독술을 마셔 혼미 상태로 누워 있던 신돌석은 일격을 당한 순간 번개처럼 튀어 쪽문을 박차고 나가 담벼락을 넘어 집 밖 풀섶에 쓰러진다.’

다섯번째 영덕 현지 촬영이었다. 신돌석 장군이 마지막 포효를 터트리며 쓰러졌다는 그 현장에 서니 모골이 송연했다. 성실하게 재현했다. 다 찍고 장비를 추스를 즈음부터 밤안개가 꾸역꾸역 초가집을 덮치고 있었다.

[%%IMAGE13%%]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서울을 향해 늦은 야행을 하고 있었다. 영덕을 빠져나갈 무렵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잠들었다. 하지만 전체 책임을 맡은 연출자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맨 앞 조수석으로 옮겨 전방을 주시하며, 이런저런 말을 걸어 운전기사의 잠을 깨워야 했다. 안개는 시간이 갈수록 짙어졌다. 눈앞의 차선이 안 보일 정도로 짙었다. “최소한 10m 앞이라도 안개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안개제어기 같은 건 없을까?” 내 얘기에 운전기사도 동조해 마지않는다. 그러자 중간쯤 앉아 있던 원로 탤런트 최남현이 헛기침처럼 혼잣말을 했다. “누가 자연을 거역하리오….” 그렇다. 자연을 거역할 자 누구인가. 자연 속의 자연인, 서민영웅 신돌석,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을 만나러 길을 찾아 나섰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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