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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10 22:32 수정 : 2018.08.23 21:58

고석만 연출은 1983년 8·15 특집극 편집을 끝내자마자 20일 만에 준비한 일일 다큐드라마 <간난이>로 뜻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충청도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고아 남매’ 간난이(김수양·가운데)와 영구(김수용·왼쪽)가 ‘곱추 할머니’(정혜선·오른쪽)와 함께 이웃들의 도움 속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고난의 시대상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고석만 연출은 1983년 8·15 특집극 편집을 끝내자마자 20일 만에 준비한 일일 다큐드라마 <간난이>로 뜻밖의 ‘대성공’을 거둔다. 충청도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고아 남매’ 간난이(김수양·가운데)와 영구(김수용·왼쪽)가 ‘곱추 할머니’(정혜선·오른쪽)와 함께 이웃들의 도움 속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한국전쟁 직후 고난의 시대상을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30회) ‘일일 다큐드라마-간난이’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일일극 <간난이>는 초단기 졸속 기획이었지만, 삽화가 이우범 화백의 수채화로 그린 타이틀 화면이 ‘예고 방송’으로 나갈 때부터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위 사진)
<간난이>는 일일극 최단기 졸속 기획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이다. 1983년 8월10일, 8·15 특집극 <엄복동>의 제작을 마치고 테이프를 주조정실에 넘긴 뒤 집에 돌아왔다. 한달 만이다. 그날 밤 <뉴스데스크>가 끝날 즈음, 제작이사로부터 화급한 전화를 받고 회사로 다시 나왔다. 제작이사의 방엔 이재우 작가가 앉아 있다. 제작이사의 첫마디는 이랬다.

“지금 나가고 있는 김수현의 일일극 <다녀왔습니다>가 신통치 않다. 급히 바꿔야 한다. 8월29일 월요일 후속극 첫 방송 날짜가 잡혀 있다. 정확히 20일 남았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하자.’ 하나만 정해져 있다. 8·15 특집극이 끝나길 기다렸다. 오늘 밤부터 작업 시작하라.”

그날 밤부터 사흘간 이 작가와 날밤을 새우며 기본방향 잡고, 주제 정하고, 구성하고, 인물 설정하고, 전체·첫주 플롯을 짰다. 누나로 할 것인가, 오빠로 할 것인가?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에서 방영 중인 <오싱>을 들먹이며 차별화 차원에서 오빠로 하자는 게 이 작가의 의견이다. <오싱>을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데 소신껏 하자는 게 연출자인 내 의견이었다. 정서적인 측면을 중심에 둔다면 누나가 맞다. 서로 동의에 이르렀다. 정리하여 시놉시스와 기획안을 작성하는 데 이틀을 보내고 결재를 올렸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1953년 충청도의 시골마을에 11살 누나 간난이와 8살 동생 영구는 전쟁고아가 되었다.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아버지와 남편의 전사통지를 받고 미쳐버려 행방불명된 어머니. 이제 남매는 할머니와 함께 산다. 할머니는 한 마지기 논밭을 갈아먹으며 오늘도 논에 나가 새를 쫓는다. 훠~이 훠~이, 새를 쫓는지 뉘를 부르는지, 훠~이 훠~이, 초가을의 넓고 높은 하늘은 석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붉다.’

동시에 캐스팅 작업을 진행했다. 후보 자료 정리하는 데 3일, 공개·비공개 면접하는 데 3일, 최종 결정하는 날, 간난이와 영구 후보 두 아이를 데리고 과일가게에 들렀다. 좋은 사과를 골라보라는 게 마지막 관문이다. 두 아이는 깜찍하게도 잘 익은 사과를 골라낸다. 늦여름에 풋사과 고르기가 어디 쉬운가? 야외로 데리고 나가 카메라 테스트를 했다. ‘누나 김수양’은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우등생답게 차분한데, ‘남동생 김수용’은 약간의 방송 경험이 있다 하여 까분다. 카메라맨 김명균 아저씨에게 꿀밤을 먹자 즉각 적응한다. 분장실에 데려와 간난이는 단발로 싹둑 자르고, 영구는 바리캉으로 머리를 빡빡 밀었다. 한데 녀석들은 울지 않는다. 그 의젓함에 왈칵 정이 들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영락없는 50년대 시골 아이들이다.

<간난이>의 아역 주인공 김수용(왼쪽)과 김수양(오른쪽)은 서울 아이들이었지만 머리를 밀고, 단발로 자르자 영락없는 1950년대 산골의 고아 남매로 변신했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이 엄청난 작업을 6일 만에 해냈다니… 8월16일 <조선일보>가 발 빠르게 ‘특종 보도’를 하니, 이튿날부터 도하 신문에 홍보가 시작되었다. 방송 예고편을 내야 하는데 아무런 자료도, 준비도 없다. ‘간난이 김수양’의 프로필 사진을 스틸로 잡아 전쟁과 참상의 자료 필름을 깔며 <일일 다큐드라마 간난이> 타이틀을 집중부각했다.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본방송 열흘 전이다. 이 호의적 반응에 힘입어 타이틀백도 삽화가 이우범 화백의 수채화로 시대를 재현하였다. ‘원 신 원 컷의 원칙’으로 끊이지 않는 여인의 일대기를 15㎝ 폭에 5m 넘는 백지에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갔다. 최종혁 작곡에 당시 인기 절정 윤시내의 노래가 주제가로 어우러졌다. 22일 5회분 탈고. 23일 하루 책읽기 연습하고, 24·25일 야외촬영, 하루 편집, 27일 스튜디오 녹화, 29일 첫 방송이 나갔다. 숨막혔다.

첫회의 핵심은 ‘배고픔’이다. ‘8살 영구는 끝없이 허기져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삶은 감자를 맛있게 먹고 있는 옆집 아저씨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벌린다. 감자 하나를 얻는다. 기쁜 마음에 집으로 가는 길. 간난이 누나에게 잡힌다. 간난이는 구걸하는 영구가 싫다. 일하지 않고 동냥하는 동생이 싫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참뜻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리라. 끝내 누나는 동생을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멀리 새 쫓는 할머니(정혜선)의 ‘훠~이 훠~이’ 소리가 들리고…. 다음날부터 영구는 지게를 메고 꼴 베러 나섰다. 저보다 두 키 넘는 한 짐을 메고 온다.’

사건이 아닌 감성을 앞세운 드라마가 나갔다. 누선을 자극하였다. 이 파격적인 시도에 찬사가 쏟아졌다.

<간난이> 방송 사흘째인 1983년 9월1일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기(KAL 007편) 격추사건으로 269명 탑승객 전원이 희생당하는 충격적 사건이 터졌다. 매일 밤 ‘9시 뉴스’의 비극적 참사 보도에 집중했던 시청자들이 바로 다음 프로인 <간난이>의 따뜻한 감성 연출에 상대적 위안을 받으며 한층 몰입하는 ‘역설적 후광 효과’가 나타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런데 방송 시작 사흘 만인 1983년 9월1일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대한항공 보잉747 여객기가 미국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중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사할린 모네론섬 부근에 추락해 269명 전원이 사망한 것이다. 냉전이 빚은 참사였다. 모든 시선이 뉴스에 쏠리니 ‘9시 뉴스’ 직후에 방송된 <간난이>는 후광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국가적 비극 상황이어서 시청률이 높아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소련의 잔인무도함에 대한 충격과 분통으로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시청자들은 뒤이어 단발머리 간난이를 보면서, 빡빡머리 영구를 보면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감성에 젖는 독특한 시청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시청률 또한 자체 조사 65%대를 상회했다. <간난이>는 2주째부터 관심이 폭발했다.

‘간난이가 법정유행병인 장티푸스에 걸렸다. 사람들과 격리해야 한다. 동네 밖 시냇가로 쫓겨났다. 흐르는 물이나마 마실 수 있는 뚝방 밑 밤나무에 묶였다. 그리고 사방 10여m 새끼줄을 둘러 감금했다. 간난이는 심한 열에 실신 상태로 가마니 위에 누워 있고, 새끼줄 밖의 영구는 안타까울 뿐이다. 독백처럼 누나를 부르던 영구는 눈물이 터진다. 시청자도 같이 운다. 영구의 극진한 간호가 시작된다. 미음을 쑤어다 남몰래 새끼줄을 넘어 누나 입에 한숟갈 한숟갈씩 떠먹이고, 물을 적셔 땀을 식히고, 밤을 같이 새우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보살핀다. 이틀밤을 넘기고야 간난이는 열이 내린다. 누나를 부둥켜안고 우는 영구를 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같이 운다. 마을공동체가 보였다.’

1983년 ‘엄복동’ 마치고 한달 만에 귀가
제작이사 ‘화급’ 호출에 다시 한밤 출근
“당장 ‘어린이 주인공’ 새 일일극 준비”
첫 방영일까지 불과 ‘20일’ 남아 초비상

이재우 작가와 사흘간 밤샘 기획회의
“우리 정서엔 오빠보다 누나로” 합의
‘전후 53년 충청도 산골 전쟁고아 남매’
11살 간난이 김수양·8살 영구 김수용

6일만에 캐스팅, 1주일사이 촬영·편집
8월29일 첫 방송…아역들 연기에 찬사
9월1일 ‘소련의 대한항공기 피격’ 참사
‘9시 뉴스’ 시청 급등에 후광효과 ‘역설’

‘오싱 모방’ 취재하러 온 NHK “다르다”
안기부도 감동한듯 2년만에 ‘감시 해제’

‘장티푸스에 걸려 마을에서 격리된 누나 간난이를 남몰래 간병하는 남동생 영구’. <간난이> 방송 초반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대표적인 장면을 이우범 화백이 그렸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언론의 반응이 참 좋았다. <한국일보>(1983년 9월6일치 김훈 기자)는 ‘대중적 공감의 바탕 구축’ 큰제목에 ‘시청자들이 체험한 삶의 모습 그려’, ‘시대상 반영에는 외형보다 정서를’ 부제로 호평했다. “<간난이>는 티브이 드라마로서의 믿음직한 대중성의 싹수를 보여주고 있다. <간난이>의 대중성이 믿음직하다는 것은 극작가·연출가가 대중의 생활과 정서와는 무관한 내용을 지어내서 시청자에게 허구의 통속성을 강요하지 않고 대중의 공통체험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살아 있는 대중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중략) 정치, 경제 또는 역사를 소재로 ‘시대상’을 그려내려는 드라마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드라마들이 시대의 외형에만 집착하고 있었고, 때로는 지나친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있었으며 또 동시대와의 마찰 등으로 인해 드라마로서의 여운을 길게 남기지 못했었다. 이런 점에 비한다면 이름 없는 한 시골 여성의 성장 과정을 통해 ‘시대상’을 그려내겠다는 <간난이>의 의도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런 시도는 시대의 외형뿐 아니라 시대의 정서적인 내용을 이루는 폭넓은 대중성으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의 터전을 마련한 셈이다.”(후략)

<간난이>의 작가와 연출은 ‘악인 없는 드라마’에 동감했다. 시대상을 치유하는 첫번째 묘약은 ‘사랑’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전쟁으로 파편화된 가족관계·이웃관계·사회관계를 이어 붙이는 접착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람 관계에서 이면 의식을 중시하였다. 내면의 심성, 말 못할 사정, 내가 아닌 너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영상 또한 다른 기법을 찾았다. 전체를 보여주는 롱샷 기법, 롱테이크 기법, 그리고 뒷모습을 잡아내고 그 뒷모습을 그윽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그려나갔다. 어느 날 이 작가는 “뒷모습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삶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의미화하고, 드러내고자 세심하게 고안하였다. 그것은 실천의 말들이었다. 향수를 부르는 것들. 논·밭·배내옷·베잠방이·깡동치마·원두막·서리·고추잠자리·달·불놀이·흰쌀밥·바다·포말·고드름…. 관점의 이동을 끌어내 서로간의 위로·동질·미래를 그려나가려 애썼다.

<간난이> 후반부 할머니(정혜선)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남매는 진짜 고아가 된다. 할머니가 죽은 장면 촬영 때 ‘간난이와 영구’가 너무나 서럽게 울어 ‘죽은 할머니’ 정혜선도 따라 우는 바람에 계속 ‘엔지’를 냈다는 일화도 남겼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간난이는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기와집’의 식모로 들어가게 된다. 학교 보내주겠다는 한마디에 성큼 들어섰다. 열심히 일했다. 주인마님(김용림)은 무서운 듯 보이지만 마음은 새털같이 곱다. 그 아들인 삼촌(길용우)은 많은 지혜를 익혀주고, 머슴 아저씨(나영진)는 영구를 아들처럼 아꼈다. 간난이의 학교 가는 날을 손꼽는 설렘의 시간들은 눈물의 나날이었다. 공책·몽당연필·책보따리, 드디어 학교 가는 날, 아침부터 꼭 달라붙는 영구를 떼어내지 못하고 끝내는 옆자리에서 같이 앉아 공부하는 남매. 갖가지 학교생활 에피소드는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배우게 한다. 허름한 교실, 독재자 이승만의 사진 밑 교단에서 영구는 옆자리 형과 두 손 들고 씩씩거리며 벌을 받는다. 둘은 울면서 벌을 받지만, 끝나면 금방 친하게 논다. 아이들은 안 가르쳐 줘도 옳은 일을 할 줄 안다. 시청자는 그들이 모두 예쁘다.’

김수용(왼쪽)·김수양(오른쪽) 이름까지 비슷한 두 배우는 방송 5개월 동안 친남매 같은 호흡으로 큰 사랑을 받았고, 1983년 문화방송 연말 연기대상에서 특별상도 받았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언론의 찬사는 이어졌다. “아픈 체험의 극화 공감 불러”(<중앙일보> 9월19일치 신규호 평론가), “시청자 관심 끄는 간난이”(<경향신문> 9월19일치 박성수 기자),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화제”(<조선일보> 9월20일치 정중헌 기자), ‘박기정 화백의 수양·수용의 캐리커처는 압권이다’(<중앙일보> 12월15일치 홍은희 기자)….

일본 <엔에이치케이>도 ‘해외 위클리’ 프로그램에서 “천진난만한 연기에 감동”이라며 <간난이>를 취재했다. 60% 시청률의 배경과 시청자들의 의견, 야외촬영 현장에서 주인공 남매 김수양과 김수용을 소개하고, 연출자 고석만을 인터뷰했다. “50년대 우리들의 과거 모습이 아득한 옛 추억이 된 데 대한 공감도의 폭이 시청자의 심금에 닿은 게 주요인이다.” 일본 취재팀은 애초 <오싱>을 모방한 부분을 집중조명할 계획이었으나, 막상 서울에 와서 드라마 내용을 보고 현장 상황을 들여다보니 <오싱>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그즈음 매주 불쑥불쑥 점검해오던 안기부에서 여지없이 또 전화가 왔다. 그런데 담당 과장의 밝은 목소리는 처음이다. “이제 전화 안 할게요.” <제1공화국> 이후 꼬박 2년 만에 감시(?)에서 풀려난 셈이다. 그 이후엔 연락이 없었다.

<간난이>의 중심축인 ‘남매의 할머니’ 정혜선은 83년 40대 초반으로, 70대 곱추 노인역을 실감있게 연기해 연말문화방송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송추, 일영의 <간난이> 촬영장은 관광버스의 단골코스가 되었다. 이웅희 문화방송 사장도 격려차 촬영 현장을 방문했다. 시끌벅적했다. 사장은 크레인에 올라타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내가 보니 깜깜해요.” 간난이가 아파서 묶여 있던 냇가 뚝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새로운 감회에 젖기도 했다. 사장이 떠난 뒤, 김명균 카메라맨에게 ‘왜 뷰파인더가 깜깜하냐’ 물었더니 ‘렌즈를 닫아놓아 어두웠을 것’이란다.

닫혀진 렌즈.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대부분의 역사는 어둠에서 시작되어 어둠 속에서 끝난다. 어둠에 가려진 빛의 세상, 빛의 맨살, 빛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빛으로 비롯된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 사랑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애초 어린 시절 이야기로 기획된 <간난이>는 큰 인기에 힘입어 ‘2부 성인 시절’까지 연장방송됐다. 1부 마지막회에서 동네 어른들이 영구에게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게 됐다는 이야기를 하는 장면. 왼쪽부터 간난이의 양부모(김혜자·박규채 부부), 무수동 삼촌(길용우)·영구(김수용)·머슴(나영진)·간난이(김수양) 등이다. 문화방송 제공
<간난이> 1부 마지막회 시높시스를 다시 꺼내본다. ‘기와집 삼촌과 알게 모르게 긴 시간 논의 끝에, 간난이는 영구를 미국으로 입양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날 이후 할머니의 ‘훠~이 훠~이’ 새 쫓던 소리는 한층 멀리 퍼져나갔다. … 영구가 입양 가는 날이다. 입양기관 사람들이 나오고, 영구의 잠방이는 바지로 갈아입히고, 동네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간난이는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모두들 고개 돌려 훌쩍이는데, 영구만 입 꾹 다물고… 말없이 마을을 떠난다. 영구는 집을 나서자 길을 잃었다. 공항 비행기 앞에 당도하자 말없던 영구의 울음보가 터졌다. 트랩에 오르기를 거부하고 도망친다. 비행기 바퀴 밑을 돌아 황량한 활주로를 내달린다. 그 순간, 간난이는 이삿짐 보따리를 메고 동구 밖 언덕을 오르고 있다. 영구가 어른들 손에 잡혀 다시 트랩에 올려질 때, 간난이는 산등성이를 넘어선다. 영구의 울음소리와 함께 또 다른 산을 넘고 있다. 어둠이 제아무리 깊어도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간난이는 잘 알고 있다.’

<간난이>의 대성공 덕분에 고석만 연출은 시작할 때 아역배우들에게 약속했던 제주도 야외 촬영 겸 ‘포상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제주의 바닷가 마을에서 1부 마지막회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부터 김수용·고석만·김수양·이미지 등이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IMAGE11%%]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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