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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5 10:00 수정 : 2018.08.26 10:56

1985년 고석만 연출과 김기팔 작가는 ‘광복 40돌 특집 대하드라마’ <억새풀>에서 또 한번 긴 호흡을 맞췄다. 윤씨 집안 할머니 현씨(문정숙·왼쪽부터), 시어머니 김씨(김용림·가운데), 며느리 신씨(허윤정·오른쪽) ‘여인 3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근대 한국 여성 100년사’를 다룬 첫 드라마였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1985년 광복 40돌 특집극 ‘억새풀’
‘여성 주체로 그린 서민 100년사’
김기팔 작가와 2년만에 새 연속극

문정숙~김용림~허윤정·딸 황신혜
‘윤씨 집안’ 여인들 한맺힌 삶 열연
개항·일제·전쟁·민주화운동까지
“이 땅 여인들을 위한 세상은 없었다”

‘민족주의자’ 박규채 “오날날” 유행어
엿장수 된 ‘독립군 장군의 손자’도 화제

KBS 사장 출신 문화공보부 ‘이 장관’
두 방송 대하극 연출자 등 불러 압력
‘부당’ 항의하자 방송사 간부 꾸지람

1985년 고석만 연출과 김기팔 작가는 ‘광복 40돌 특집 대하드라마’ <억새풀>에서 또 한번 긴 호흡을 맞췄다. 윤씨 집안 할머니 현씨(문정숙·왼쪽부터), 시어머니 김씨(김용림·가운데), 며느리 신씨(허윤정·오른쪽) ‘여인 3대’를 주인공으로 삼아 ‘근대 한국 여성 100년사’를 다룬 첫 드라마였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32회) ‘억새풀-여인 3대 억눌린 이야기’

“심판받고 싶다”,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리자다”, “단순화하라”, “통곡의 역사, 한 맺힌 역사”, “역사가 억울하다”, “억울하다”, “오날날, 잃어버린 내 인생”, “오날날, 나쁜 놈만 잘 살고”, “오날날….”

‘남루한 노인(최낙천)이 피를 토하듯 쏟아낸 말, 말들로 프롤로그가 열렸다. 최낙천은 늦은 밤 고급 저택 대문 그늘에 숨어 있다가, 승용차에서 내리는 팔순의 오지명을 기습한다. 최낙천은 죽은 박규채의 강남 땅을 돌려받으러 왔다는 거다. 가벼운 몸싸움 끝에 최낙천은 폭력행위로 구금되고, 그 과정에서 그가 터트린 한마디, 한마디는 57회 드라마 전체를 압축한 말, 말들인 것이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소설 한권 쓰고 싶은 작가 지망생 검사 심양홍에 의해 아프디아픈 사연들은 기록되고 있고….

일본 유학에서 좌절하고 지체장애인으로 사는 ‘이 시대의 지식인’ 최낙천(오른쪽)과 독립군 홍두식 장군의 아들로 학교조차 다니지 못해 엿장수로 사는 박경순(왼쪽)은 <억새풀>의 또 다른 주역들이었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검찰로부터 연락받고 면회를 온 허윤정은 최낙천에게 듣게 된다. “조카! 인섭이(길용우) 살아 있는 거 모르지? 강원도 정선군 교회당의 종지기, 반신불수로….”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 있다니! 경악한 허윤정, 40년간 생과부로 지낸 그에게 떠오르는 지난날의 환영들…, 윤씨 집안의 여인 3대가 차례로 보인다.

100년 전 인천 개항 즈음에 윤씨 집안을 일으킨 시할머니(현씨) 문정숙이 떠오르고, 3·1운동 참여 직후 시집온 시어머니(김씨) 김용림이 다가온다. 그리고 1940년대 초 일제 말 ‘대동아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그때, 시집온 지 14일 만에 학도병에 끌려간 남편(윤인섭·길용우)을 기다리며 생과부로 반평생을 살아온 며느리(신미숙) 허윤정. 지금 그를 딸 황신혜(윤해방)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대하드라마 <억새풀>은 국악 합주에 맞춰 한국무용을 추는 무희들과 더불어 ‘여인 3대’ 주인공과 딸 황신혜(사진)가 한복 차림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타이틀 영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1985년 문화방송의 ‘광복 40주년 기념 대하드라마’ <억새풀>(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은 여인 3대를 통해 이 땅의 서민 100년사를 그리고자 기획되었다.

‘계집애는 서당에 가서 글도 배우지 못했던 시대, 국채보상운동 때 담배 끊지 못해 부뚜막 앞에 숨어서 곰방대를 빨아대던 할머니. 그 뒤 3·1운동은 여성의 위상을 바로잡아 나갔다. 친일파 집안의 딸, 시어머니는 또 다른 아픔이 있었다. 어른들의 정혼으로 홀로 한평생을 지낸 여인 한씨도 등장한다. 며느리는 그 한씨를 찾아 나섰다. 4월에 사전 녹화한 겨울 장면, 눈길은 안다, 그 여인들이 걸어온 길을. 일제 말 공출과 정신대, 학병 차출이 온 나라를 광풍처럼 휩쓸고 갔다.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 절망의 세월 속에서 여인들을 위한 세상은 없었다. 열 자녀 낳기를 강요받던 여자들, 그 뒤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외쳐댔다.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동일방직 노조 투쟁사. 민청학련 사건 그리고 여성민우회 태동까지 여인들은 달려왔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이토록 여권 신장을 진실되게 외쳐본 적이 있었던가. <억새풀>은 여성이 주체가 된 드라마, 여성 문제가 주제로서 우뚝 선 드라마로 새롭게 기록될 것이다.

타이틀 화면부터 새로웠다. 새납으로 시작한 박범훈의 국악 합주가 김란의 구음으로 하늘을 찌를 때,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더니 한국무용 한풀이가 실루엣 군무로 변하고, 여인 3대 전승을 상징하는, 문정숙의 한서린 몸짓, 김용림의 발 품새, 허윤정의 손놀림, 황신혜의 회전에 따라 다시 한풀이 군무로 덮쳐진다. 김양근의 안무에 여인 3대 연기자들의 짧은 한국무용이 아름답고 새롭다.

<억새풀>에서 드러난 남자들, 강해서 부서지기 쉬운 이 땅의 남자들이다. 독립운동하다 만주에서 전사한 할아버지를 따라 목숨 걸고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박규채(윤경순). 그는 민족주의자의 상징적 인물, 40년간 선거에 3번 도전 모두 탈락한 박규채의 ‘오날날’은 신조어로 유행했다. 그가 이상주의자의 표본이라면, 부인 김용림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김용림은 직설적 표현과 넘치는 에너지로 그해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새로운 여성상을 창출해낸 것이다.

<억새풀>에서 윤씨 집안의 2대 박규채(맨왼쪽)는 민족주의자로 등장해 기회주의자인 오지명(맨오른쪽)과 끊임없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오날날”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박규채는 처남 오지명(김관익)과 영원한 라이벌이다. 격변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날로 사업을 팽창시켜 번영을 누린 오지명. 영악한 기회주의자인 그의 행적을 보며 시청자들은 울분을 토했고 ‘이거야말로 진짜 우리의 아픈 현실’이라고 탄식했으나, 오지명은 그 나름대로 ‘어차피 비참한 시대 아니냐, 타의에 의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폈다. 그런 이를 끊임없이 비난하는 ‘절름발이’ 최낙천(김상식). <억새풀>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일제 때 일본에 가서 대학을 다니다 퇴학당하고 귀국, 장애인으로 사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다. 드라마에서 ‘머리 좋은 양반’으로 불리며 박규채의 참모이자 친구 노릇을 한다. 최낙천은 가장 한국적인 마스크라고 지칭되지만, 가장 지식인답다는 얘기도 듣는다. 다음은 독립군 홍두식 장군의 아들 ‘홍승일’ 역을 맡은 박경순, 엿판이 달린 리어커를 끌고 온종일 엿장사를 다닌다. 그는 독립군 집안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여 공부 못한 죄로 고생할 뿐이다. 그리고 이 집의 외아들 길용우.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941년 학병 4385명의 분포를 보자.(2018년 1월 행정안전부 발표 자료) 학병 차출 대상으로 지목된 6203명 가운데 70%가 군인 차출이다. 그 절반은 일본 본토, 30%는 만주, 20%는 동남아 태평양지역 파견, 끝내 거부한 청년은 군수공장 강제노역이다. 이때부터 44년 말까지 일제가 패전을 앞두고 저지른 패악의 절정이다. 오늘에 와 하늘에 물어본다. 모진 세월 그들은 어찌 살았느냐고.

드라마 <억새풀>은 일제 학병에 끌려간 뒤 한국전쟁 때 인민군 장교로 돌아왔다 전사한 줄 알았던 남편(길용우)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30여년 만에 전해들은 신씨(허윤정)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서 여인 100년사가 펼쳐진다. 사진 ‘엠비시 가이드’ 제공
‘결혼 14일 만에 학병 떠난 남편 길용우가 돌아왔다. 그러나 곧 증발한다. 그리고 6·25 인공 치하 90일 동안 오토바이 타고 나타난 북한군 소좌. 그의 출연은 짧지만 아주 강렬하다. 그러더니 전사 소식이다. 그때 허윤정은 딸을 출산한다. 어느새 30대를 훌쩍 넘긴 딸 황신혜는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천둥치는 밤, 카메라는 허윤정·황신혜 모녀를 끌어안듯 한참을 보여준 뒤 멀리 빠져나가 이 집의 전경을 잡고 그 순간 번개가 번쩍인다. 금이 간 이 집은 지금 신음하고 있다.’

우리에게 광복은 무엇인가. 광복은 분단이요, 외세의 침입이다. 좌우의 갈등이며 친일파 득세다. 드라마 <억새풀>에서는 끝없이 ‘오날날’을 외쳐댔다.

1980년 언론 통폐합을 주도하고 한국방송 사장을 거쳐 85년 2월 문화공보부 장관인 된 이원홍(가운데)은 한국방송·문화방송의 대하드라마 연출자와 간부들을 불러들여 ‘금기 사항’을 지시했다. 사진은 85년 4월 장관실에서 방송협회의 공로패를 받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원홍 문화부 장관의 호출이다. 특이하게도 한국방송(KBS)·문화방송(MBC) 양사의 대하드라마의 연출자를 함께 불렀다. 문화부 매체국장이 안내하여, 양사의 드라마 본부장과 국장까지 모두 6명. 접견실에 지루할 만큼 오래 앉혀놓더니, 장관은 불쑥 들어와 앞도 뒤도 없이 내게 덥석 악수를 한 다음 “말만 들었는데… 허허… ‘몹 신’(군중 장면) 처리가 대단해요. <거부실록-이승훈> 때 마당에 수십명이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데 카메라가 줌인하더니 새끼 원숭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잡더군요. 허허… ‘한국방송’에서는 상상도 못해요.”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낼 이야기인가? 그가 엊그제까지 한국방송 사장이었으니 허물없다고는 해도 어이없다. 그러다가 갑자기 “친일파 이야기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반민특위는 넘어가세요!” 그리고 뭐라 인사말 몇마디 하고 나간다. 한 시간 이상 기다리게 해놓고 들어와서 1분짜리 한마디 하고 나가다니. 매체국장한테 항의했다가 우리 본부장에게 꾸지람만 들었다. 그 뒤 방송에서 ‘친일파’ 단어만 나와도 다 잘려나갔다. 이때가 1985년.

그즈음 김기팔 작가는 얼마 전 출감한 김지하 시인과 해남에서 6박7일의 술판을 벌였다. 그때 동행했던 박정기 작가 겸 평론가가 훗날(2017년) 글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겨 쓴다.

김기팔(가운데) 작가는 <억새풀>을 쓰던 1985년 가을, 원주에서 해남으로 이주한 ‘절친’ 김지하(왼쪽) 시인을 찾아가 ‘6박7일 술판 여행’의 일화를 남겼다. 사진은 1960년 4·19 직후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사진 김지하 시인 제공
‘1985년 김기팔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지하 시인이 해남에 자리를 잡았다며 같이 가보자는 전화였다. 날짜를 정해 가기로 약속을 하고, 김 작가는 김 시인이 심기를 가라앉힌다며 서예와 사군자에 심신을 기울이고 있으니, 인사동에 가서 벼루와 다기를 사다가 선물로 주자고 했다. 우리는 떠나는 날 물건을 구입하고는 곧바로 고속터미널에서 해남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중략) 해남에 도착해 김 시인이 살고 있다는 천씨라는 아전 출신 집을 찾으니 사람들이 금방 길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집에 도착해 김 시인의 환대를 받았다. 김 시인은 말끔한 모습에 건강한 편이었고, 집 안으로 안내했다. 옛 아전집 사랑채라는데 웬만한 주택 정원보다도 큰 마당에 떡 벌어진 기와집 사랑채였다. 긴 마루에 앉도록 권하더니, 우리보다 먼저 방문한 인사가 있다며 그들을 소개를 시켜주었다. 전남대 교수 출신으로 광주 지역의 대표적 재야 민주인사인 명노근(1932~2000)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전국연맹 이사장과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던 소설가 송기숙(1936~), 정치학자 출신으로 훗날 국회의원이 된 이수인(1941~2000) 등 세 사람이었다. 모두들 김 작가를 방송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었고, 무척 반가워했다. 필자도 3인을 처음 대하고 민주투사라는 명성으로 해서 강인하고 날카로운 모습인 줄 알았는데, 온화한 모습에 다정다감한 말씨, 그리고 풍부한 유머 감각으로 해서 금세 가까워질 수가 있었다. 3인이 먼저 이 집의 방을 정했기에 김 작가와 나는 천씨집이 아닌 해남의 한 여관에 묵기로 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음주를 좋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나면 대화를 술로 시작해서 밤에 잠이 들 때가지 술을 계속 들고는 했다. 마침 그 무렵에 완도 연륙교가 해남과 연결되어 수영 선수 조오련의 코치였다는 김씨 성을 가진 청년이 직접 완도를 안내했고, 강진의 다산초당도 방문하고, 해남 대둔산의 초의선사가 있었다는 일지암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 작가는 김 시인에게 투옥되어 있을 때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으니, 김 시인은 교도관들이 내가 쓴 ‘오적’이라는 시를 다들 읽고 좋아하는 눈치였다며 그래서 그런지 전혀 고문을 당한 일이 없노라고 대답을 해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6박7일은 금방 지나갔고, 김 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김 작가는 김 시인의 손을 붙들고 죽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고 당부를 하며 돌아왔는데…(후략).’

1985년 ‘광복 40돌 특집 대하드라마’ <억새풀>은 7개월에 걸쳐 57회가 방영됐다.
<억새풀>은 1985년 6월6일부터 12월26일까지 57회 방송되었다. 김 작가와는 <야망의 25시> 이후 특집극은 여러 편 호흡을 맞췄지만 연속극으로는 2년 만에 만났다. 행복한 호흡이었다. 작가의 원고는 대단한 악필이다. 글자들이 실지렁이처럼 구불구불 엉켜 있음에도, 연출자에겐 화살촉처럼 쏙쏙 꽂혀 온다. 말의 눈에 풀이 보이고, 풀의 눈에 물이 보이듯이, 풀의 시각으로 낮은 곳을 보면, 세밀하고 예쁜 것은 낮은 곳에 있다. 인간의 눈, 말의 눈, 인간의 발과 말의 발, 그들은 서로 믿기에 함께 질주할 수 있다. 우리 두 사람은 유목민처럼 여섯 발로 내달렸다.

<억새풀>은 대한민국의 우화다. 씁쓸한 서사다. 그러나 비극에도 희망의 횃불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광복, 해방을 맞는 그날, 내내 다리를 절던 최낙천이 멀쩡하게 대문 지방을 넘어오는 것을 본 식구들은 놀라며 환호를 터트렸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리자다”, “통곡의 역사, 한 맺힌 역사를 끝내자”.

<억새풀>의 57회 마지막 장면. 엿장수 박경순이 서울 명동 한복판을 리어카 좌판을 끌고 가며 “85년 오날날~” 고함을 통해 광복 40년의 의미를 묻는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억새풀>의 마지막 장면은 멀리서 잡힌 독립군의 손자 박경순으로 설정했다. 그는 명동 한복판을 엿판 리어카를 밀고 가며 “85년 오늘, 오날날, 우리는 성공작이다!” 고함, 고함을 지르고 있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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