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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22 13:53 수정 : 2018.09.22 15:28

1989년 11월 고석만 연출·이상현 작가는 <제2공화국>을 통해 한국전쟁 때 국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거창 사건’을 2회에 걸쳐 집중조명했다. 특히 1951년 2월 사건 발생 이후 부산피난국회의 특별조사단의 현장 조사를 ‘가짜 공비 습격’까지 동원해 방해했던 당시 헌병사령관 김중원(백인철) 등 이승만 정권의 진상 은폐 과정을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1989년 11월 ‘제2공화국’에서 조명
‘거창사건 재조사’ ‘작전명령’ 2회 연속

60년 5월 ‘거창 신원면장 생매장’ 계기
“51년 국군의 주민 700여명 학살·은폐”
허정 내각수반 지시로 9년 만에 ‘재조사’

11사단장 최덕신 ‘견벽청야’ 작전 명령
“공비는 고기, 주민은 물…양민도 적으로”
생존 주민들 증언 바탕 ‘비장하게’ 재현

방송 직후 드라마국 간부들 반응 ‘수상’
대본부터 제작진 신원까지 ‘모처’ 전달
“이상현 작가가 ‘TK’라서 없던 일로…”

90년 ‘엠비시 연출상’…첨이자 마지막 상
91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연출·대상’

1989년 11월 고석만 연출·이상현 작가는 <제2공화국>을 통해 한국전쟁 때 국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거창 사건’을 2회에 걸쳐 집중조명했다. 특히 1951년 2월 사건 발생 이후 부산피난국회의 특별조사단의 현장 조사를 ‘가짜 공비 습격’까지 동원해 방해했던 당시 헌병사령관 김중원(백인철) 등 이승만 정권의 진상 은폐 과정을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했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36회) ‘제2공화국-거창학살사건 재조사’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제2공화국>은 1960년 5월 ‘신원면장 생매장 살해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거창사건 재조사’부터 89년 현재 유족들의 명예회복 호소까지 숨겨진 현대사의 비극을 오롯이 드러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문화방송 제공

유족들은 모였다. 100명이 넘었다. 그들은 유골을 한데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6·25 당시 신원면장을 지낸 박영보를 찾아 박산골 사건 현장으로 끌고 가 모진 폭행으로 실신시키고, 생화장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4·19 직후인 1960년 5월11일. 이로써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1년 초,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시작된 이후 빨치산의 공세가 강화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은 여순사건으로 피신한 일련의 집단과 공비가 되었다. 정부는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한국군 11사단을 동원했다. 이때 사단장 최덕신. 그가 휘하부대에 보낸 토벌작전의 이름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들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중국 황포군관학교 시절 배웠고 훌륭한 전과를 경험했다는 이 작전은, 어처구니없게도 적국 국민은 물론 지역의 주민 또한 제거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뒤,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작전이다. 최덕신은 명령했다. “작전지역 안의 인원을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가 되는 건물은 모두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모두 소각하라!” “공비가 고기라면, 주민은 물이다.”

1951년 2월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이른바 ‘공비는 고기, 주민은 물’이라며 공비토벌작전을 주도한 11사단장 최덕신의 ‘견벽청야’ 작전명령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최덕신은 70년대 후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86년 북한으로 귀국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9연대장 오익경으로부터 사단의 작전 개념을 구체화한 ‘작전명령 제5호’를 지시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1951년 2월5일 작전에 들어가 신원면 일대를 진격했다. 3대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신원면을 수복한 뒤 인근 지역인 함양군과 산청군 경계로 전진했는데, 2월8일 신원지서가 빨치산의 공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3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다시 신원면에 들어와 2월9일 청연마을에서부터 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2월10일 대대는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서 대현리·와룡리·중유리 마을에서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으며, 주민들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100여명을 탄량골 하천에서 학살했다. 군인들은 2월11일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주민 1천여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두 모이게 한 뒤, 이 가운데 군인과 경찰 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내고, 다음날 나머지를 박산골에 끌고 가 총살했다. 15살 이하 남녀가 359명, 16~60살 300명, 60살 이상 노인이 60명, 모두 719명(남 327·여 392)이 집단학살당했다. 11사단은 주검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고 매장하는 증거 인멸도 감행했다.

<제2공화국>은 51년 당시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견벽청야 작전명령’을 실행한 11사단 9연대 3대대장으로 한동석(정동환) 소령의 법정 진술과 훗날 인터뷰를 중심으로 51년 학살 사건과 60년 재조사 사건을 재구성했다. 문화방송 제공
<제2공화국>은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그중 한동석(정동환) 대대장의 고뇌에 찬 번민의 순간들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었다. 신원국민학교에 집단 억류된 1천여명 중 앞장서 항의하다 매 맞는 노인(강계식)의 모습도, 출산을 앞둔 산모를 몰래 숙직실로 빼주는 소년병(이장훈)의 인간적인 면도 그려졌다. 군인과 경찰 공무원 가족을 지목해 살려낸 박영보(이기영) 면장과 경찰관 박대성(박경순)의 갈등도 다뤘다. 집단학살 때 기적처럼 살아난 3명(문흥한·신현덕·문홍준)의 증언도 드라마 구성에 토대가 되었다.

산청군 생존자 최금자의 증언이 전체를 대변한다. “엄마가 숨 막히듯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덮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1951년 2월 국군이 경북 거창군 산청면 일대 주민 1천여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한 뒤 720여명을 집단학살해 암매장한 사건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현했다. 문화방송 제공

<제2공화국>은 1989년 7월부터 90년 4월까지 41회 방송되었다. ‘거창사건 재조사’ ‘작전명령’은 19·20화로 89년 11월19일과 26일 상·하편으로 나갔다.

‘거창사건은 그것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개월 뒤, 헌병감 최경록(한규희) 준장은 익명의 편지를 한통 받는다. “거창군 대현리에 한번 가보십시오.” 근거도 정확하지 않은 편지를 무시했다. 며칠 뒤 같은 필체의 편지를 또 받는다. “왜 그렇게 겁을 먹습니까? 어서 한번 가보세요.” 최경록 준장은 그 뒤 내밀하게 조사를 시켰다고 한다. 그즈음 국회의원 서민호(이묵원)에게 신분을 알 수 없는 육군 하사관이 접근하여, ‘정 소령의 거창 자료’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고 사라진다. 약속한 날, 미행당하여 자료 전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때 대한청년단 거창군 부단장 함차산(김두삼)이 거창 국회의원 신중목(이영달)의 집을 방문한다. 함차산은 비분강개하여 거창양민학살사건의 희생자가 500명을 넘고 700명도 더 될 것이라 한다. 신중목 의원은 당치 않는 소리라 했지만 사실이었다. 부산 피난 국회와 군부는 거창사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1951년 3월 대한청년단 거창군 부단장 함차산(김두삼)이 거창 국회의원 신중목(이영달)을 찾아와 진상을 전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문화방송 제공
1951년 당시 거창 국회의원 신중목(이영달)은 학살 사건을 폭로해 특별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시도하는 등 진상규명에 앞장선다. 거창 현지에는 훗날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문화방송 제공
그해 3월29일 신중목 의원은 당시 악명 높던 헌병대와 특무대의 협박과 추격을 피해, 부산극장에서 열린 제54회 임시국회에서 이 사건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국회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거창 현지로 파견한다. 지프차 3대에 분승한 조사단 일행은 현지에서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대령 김종원(백인철)의 영접을 받는다. 김종원은 현장 접근의 위험성을 피력하며 박산골 진입을 극구 만류한다. 그러나 조사단은 강행한다. 국회 조사단이 박산골 언덕을 넘을 때 공비들의 집중 사격을 받는다. 갑자기 번개를 동반한 폭우를 만난 듯 총알이 빗발쳤다. 김종원이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가장해 위협적인 총격을 가함으로써 조사를 방해한 것이다.’

1951년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양택조)는 국회의 현장조사를 방해하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해 규모를 축소·왜곡 보고하는 등 ‘거창 학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다. <문화방송> 제공
<제2공화국>은 비장하게, 리얼하게 재현했다.

‘신중목 의원의 국회 재조사 감행과 5월8일 국회의 결의로 양민학살사건과 조사방해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자, 내무·법무·국방 3부의 장관이 사임했고, 직접 책임자인 9연대장 오익균(김영인) 대령과 3대대장 한동석 소령에게는 무기징역, 국회 조사를 방해한 김종원 대령에게는 3년형이 선고되었다. 그 뒤 이들은 이승만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채되었다. 훗날 드러난 수많은 양민학살사건의 원인이 된 작전명령 ‘견벽청야’의 최덕신은 책임을 모면하고자 76년 미국으로, 그 뒤 86년 월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강력한 보도통제령을 하달하였다. 이를 보고 영국의 <런던 타임스>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951년 3월 국회 특별조사단의 거창 학살 사건 현장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던 당시 헌병사령관 김종원(왼쪽)은 이승만(오른쪽)의 총애로 곧 풀려났고, 훗날 경찰국장으로 승승장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리고 60년 4·19 직후. 거창의 ‘박영보 생매장 사건’을 보고받은 허정(박종관) 내각수반은 이종찬(박근형) 국방장관에게 ‘거창사건’ 재조사를 지시한다. 4대 국회 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 때 민간인 피해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정부가 조직적으로 벌인 민간학살인 ‘보도연맹학살사건’과 군수비리 대형 참사로 비롯된 ‘국민방위군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과 육군에 길이 남을 수치다. 노근리사건, 제주4·3사건, 대구10·1사건, 여순사건 등 너무나 많다. 그로부터 30년 뒤의 ‘광주’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흑역사는 두껍고 무겁다. 이때(1960년) 정부는 형식적인 피해자 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 조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마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다.’

[%%IMAGE11%%] ‘거창양민학살사건’은 군이 물과 고기를 말살하는 작전이다. 주민, 빨치산 할 것 없이 민간인들을 의도적으로 몰아가 살해한 집단학살로서 대규모 인권침해 행위다. 독재정권이 정치 이념에 따라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행위는 ‘양민 학살 사건’이라 부르기보다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 우리는 사건의 의미를 사상으로 전환시키고, 이를 다시 육화해 서사화하는 일을 해야 한다.

‘거창사건’은 위령비 수난사 그대로다. 위령비. 유족들이 54년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5·16 직후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모두 흩어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땅에 묻히고, 다시 올려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다시 만들어 세우긴 했으나, 아직도 비스듬하게 누워서 완전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제2공화국> ‘거창사건 재조사’ 1부와 2부 방송 직후, 사내 간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모처에 대본과 방송물을 보냈다는 소식, 작가와 연출자, 심지어 스태프의 명단과 인적사항이 모처에 송부되었다는 소식, 검찰에서 연출자를 곧 소환할 것이라는 소식, 흉흉한 소식과 억측이 무성한 일주일을 보냈다. 자신과 우리 스태프에게 다짐했다. “두려워 마라! 사실의 힘, 믿는 자가 이기고 만다!” 방송 두번째 주일을 맞으며 검경 공조수사 체제가 갖춰지고 내밀한 조사에 들어갔다고 들려왔다. 긴장했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작가가 티케이(TK)라 괜찮다.”

이상현 작가의 <제2공화국>은 평균대 위의 회전 같은 균형을 유지하였다. 작가는 치밀한 구성과 철저한 자료조사로 극본의 완성도를 추구하였고, 유려한 필치로 높은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제2공화국>에서 이상현 작가의 기본구도는 민주당의 실정, 이승만 정권의 적폐, 젊은 군인들이 비분강개하는 쿠데타 모의를 절묘하게 교차 배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원고 집필 속도가 매번 마감시간을 넘기는 ‘작가 이기주의’ 작가다. 절대로 재고나 수정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다.

[%%IMAGE12%%] ‘거창사건’ 2부의 원고가 한꺼번에 들어왔을 때도 방송까지 겨우 5일 남았었다. 애초 원고를 받아온 최창욱 피디가 촬영 스케줄을 짰다. 12일 걸린다. 우리 형편으로는 방송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장용우 피디가 다시 짰다. 7일이 나왔다. 편성에 비상대기 프로그램을 부탁하고 촬영에 나섰다. 다른 때보다 훨씬 긴장하고 기민하게 준비했다. 박산골 가는 길과 신원리와 학교를 찾아 나섰다. 공교롭게 경기도 양주시 장흥 송추골 뒤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락을 찾아냈다. 어차피 우리나라 지형과 부락 형성이 비슷하지 않았던가. 그 천혜의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촬영하고, 촬영 필름은 장용우 피디가 그때그때 이송하여 부분별로 편집하고, 최창욱 피디는 다음 장면 세팅을 미리 하고, 김명균 촬영감독은 최악의 조건을 최상의 영상으로 만들어내고, 이틀을 꼬박 밤새워 찍고, 4시간 눈 붙이고 또 이틀 찍어 4일 만에 촬영을 끝냈다. 방송은 차질 없이 나갔다. ‘귀신은 그리기 쉬우나 개는 그리기 어렵다.’

누굴까. 맨 처음 쇠를 달궈보자고 한 사람이 있다. 뜨거운 불에 달구어 정교하고도 힘찬 손놀림으로 모양을 만들자, 찬물에 넣어 식혀보자 한다. 시커멓고 번들거리는 근육처럼 연장이 되었다. 첫 지혜를 터득한 것은 한 사람의 경험으로는 어렵다. 불과 물을 교차하자는 생각이 세상을 바꿨다. 인류사 모든 발전은 그렇게 뻗어나갔다. <제2공화국>은 그들이 모여 대한민국 정치드라마에 또 한번 큰 획을 그었다.

[%%IMAGE13%%] 이듬해 91년 <제2공화국>은 한국프로듀서연합회가 주는 ‘피디 대상’을 비롯해 모든 방송상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그랜드슬램’이다. 정작 문화방송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상을 주었다. 진정으로 동료와 직계상사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다. 고석만은 넥타이를 매고 장용우와 최창욱의 손을 잡고 방송사 근처 사진관에서 수상 기념 사진을 찍었다. 철기시대를 연 ‘우리팀’. 그 사진 한장만은 남겨놓고 싶었다. 91년 5월 ‘백상예술상’에서 작품상·연출상·대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을 물었다. 딱 한마디 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땅>이 도중하차당한 직후 김기팔 작가는 술병으로 누워 있을 때였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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