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27 04:59
수정 : 2018.09.2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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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맨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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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도 잘하는 ‘라이프’ 정문성
연극·뮤지컬로 다진 연기력 11년 내공
드라마 ‘라이프’서 살벌한 조남형 회장 맡아 ‘존재감’
눈썹·입술·절제된 표현 야비함 살려
“몸짓·눈빛 연기 승우형 리액션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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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맨스토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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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누구세요”라고 물을 뻔했다. 슬쩍 올려다보며 조곤조곤 씹어대던 살벌한 ‘조남형 회장’은 어디로 가고, 21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 해맑은 청년이 서 있다. 피곤이 덜 가신 눈을 손등으로 마구 비벼대며. “새벽에 촬영이 끝나 잠을 잘 못 잤어요. 헤헤.” 조남형 회장을 만나면 등짝 스매싱 한대 날려주고야 말겠다던 다부진 마음이 예상외의 ‘멍뭉미’(분위기가 강아지 같이 귀여움)에 스르륵 풀린다. 같은 사람 맞아?
정문성은 올해 다양한 얼굴로 시청자와 만났다. 지난 1월 끝난 <슬기로운 감빵생활>(티브이엔)에서 군대 폭력 살인 사건 범인으로 몰린 동생의 누명을 풀어주려고 눈물로 뛰어다녔다. <멈추고 싶은 순간: 어바웃 타임>(티브이엔)에서는 재벌가 배다른 형제이자 장애를 지닌 아픔을 꾹꾹 누르고 살았다. <훈남정음>(에스비에스)에서는 귀여운 남자였다. 그러더니 <라이프>(제이티비시)에선 뼛속부터 비열한 재벌 회장으로 나타났다. 방영 중인 <빅 포레스트>(티브이엔)에서는 폭력적인 사채업자로 나온다. “감사하게도 작품이 계속 들어왔어요. 캐릭터도 다양했고. <라이프> 영향인지 요즘은 악역이 많이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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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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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드라마 데뷔작 <유령> 등에서 악역을 했지만, <라이프> 조남형은 특히 도드라졌다 ‘나 재벌이다. 넌 나보다 아래야’라며 대놓고 호통치던 기존 재벌들하곤 좀 다르다. 그냥 그 무시라는 게 일상 대화 속에 훅 치고 들어온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의사들한테 “지들이 의사면 의사지. 내 병원에서 일하는 주제에”라고 말하거나, 일처리를 잘한 구승효(조승우)를 칭찬하다가 “역시 우리 그룹이 근로장학생 하난 잘 뽑았어”라고 던지는 식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연기가 나오는데, 제 기준에도 나쁜 사람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야 하니 처음엔 연기가 힘들었어요. <라이프>라는 제목처럼 ‘각자 자기가 사는 삶이라는 게 있다’, ‘조남형은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다’라고 합리화시켰어요.(웃음)”
어려운 역할은 오히려 의욕을 부추겼다. 정문성은 절제된 표현으로 조남형의 야비함을 살려냈다. 입술을 쭉 내밀거나, 왼쪽 눈썹을 실룩이고, 미간에 주름을 짓는 등 섬세한 표정 변화가 압권이었다. “제가 살면서 (한국 사회) 꼭대기 재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그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잘 몰라요. 근데 그건 시청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마음껏 표현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머리카락을 다 뒤로 넘기는 ‘올백’은 신의 한수였다. “배우가 올백을 하기는 쉽지 않아요. 얼굴을 다 까야 하는 거라 창피해서. 근데 다 뭔가 아쉬운 거예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면서 (조)승우 형한테 카톡으로 이거 어때, 저게 어때 물어봤는데 올백을 권하더라고요. 해서 다시 보내줬더니 진짜 나쁜놈처럼 보인다고. 막 웃으면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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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에서 ‘올백’ 머리가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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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는 정문성의 존재감을 각인시켜주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는 조승우, 문소리, 문성근, 유재명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작품에 폐가 될까 걱정했다”는데 ‘연기의 명당’ 조승우와 일대일로 붙는 장면에서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장면을 조승우와 함께 나왔다. “대본에는 한 덩어리의 문장이라도 중간중간에 감정, 몸짓, 눈빛이 바뀌면 승우 형이 그걸 다 받아서 리액션을 해줬어요. 내가 잘했다고 평가받는다면 그건 승우 형 덕분이에요.” 그는 “내가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에서도 승우 형이 움찔하며 위압감을 만들어 줬다”며 “그렇게 무섭지 않은 사람이, 대단하고 무서운 연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걸 대단하고 무서운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건 앞에 있는 상대”라고 말했다.
모든 공을 돌리지만, 좋은 연기의 힘은 11년간 무대에서 쌓은 내공이다. 드라마는 2012년 <유령>이 처음이지만, 그는 이전에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하며 기본기를 탄탄하게 쌓은 무대 스타다. 2007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한 이후 쉬지 않고 무대에 올라 여러 인물을 경험했다. 심심한 인물보다는 주로 연기가 어려운 역할을 골라서 맡아 왔다. 연극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17살 나이에 80살 육체를 가진 선천성 조로증 소년을 연기했고, 2016년 <헤드윅>에선 여자도 남자도 아닌 ‘헤드윅’이었다. 드라마에서도 시한부 질병을 앓거나, 동생의 억울함을 푸는 역할이었다. 스스로도 “끊임없이 나를 힘들게 해서 노력하는 역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난 1년간은 특히 사회성 짙은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라이프>는 의료 민영화를 다뤘고,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군대 내 폭력 문제였다. 그는 자신을 ‘사회에 적당히 관심을 두는 보통 사람’이라고 했다. “세월호처럼 마음이 너무 아픈 일들에 분노하고, 유기견이나 동물 학대 등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였지, 근본적으로 정치, 경제의 변화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지내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드라마를 하면서 그는 “무엇보다 이런 사실들이 은폐되고 왜곡돼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는 게 진짜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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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헤드윅’ 공연 앞둔 모습.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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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로 38살이다. 지난 11년의 연기 생활을 돌아보면 “완만한 경사를 계속 천천히 올라온 느낌”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오르고 싶단다. “얼굴이 원빈이었으면, 키가 10cm만 컸으면 이런 생각도 장난스럽게 해봤지만, 그게 내 인생을 크게 바꾸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배우는 자기 탈이라는 게 있고 자기 개성, 자기 매력이 있으니까. 평범한 듯 하면서도, 착해 보이면서도, 나쁜 것도 같은, 여러 느낌의 얼굴이 정문성이라는 배우인 것 같아요. 묵묵히 스며들어 어떤 역할이든 다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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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30대에 ‘멍뭉미’라니 싶었는데, 인터뷰 말미 강아지 얘기에 그가 더 강아지처럼 순박하게 느껴졌다. “5살 강아지 봄히(푸들)가 제 여동생이에요. 유기견이라 나이는 추정이지만. 명절에 집에서 어머니와 차례를 지내는데, 봄히도 자기 뼈다귀를 제사상에 올려요. 엎드려 그러면 같이 절하고.” 네? 뭐라고요? 허풍 좀 그만 떨라니 “진짜”라며 강아지 같은 눈을 더 크게 뜬다. “강아지 한번 키워보세요. 생각지도 못한 행복을 줄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행복. 정문성도 시청자들에게 주고 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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