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그는 제대를 앞둔 군인 신분으로 수많은 기자들 앞에 섰다. “형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방송 노동 환경 개선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소했다. 그의 형은 열악한 방송 노동 환경을 경멸하며 2016년 10월26일 세상을 떠난 이한빛 씨제이이앤엠(CJENM) 피디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방송 노동자들의 근로 환경을 바꾸겠다며 지난 1월2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를 설립했다. 형의 2주기 이틀 뒤인 28일 이한솔 이사를 서울 공덕동 <한겨레>에서 만났다.
이한솔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 이사가 28일 낮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를 했다. 뒤로 보이는 사진은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가 문을 열 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의 모습이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형이 경멸했던 그 판에 뛰어든 지 9개월, 그는 “방송 노동 환경은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했다”고 되짚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도급 계약’(턴키 계약)이었다. 방송사는 건설사나 다름없었다. 방송사·제작사는 연출팀·제작팀·촬영팀 등과 개인별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조명팀·동시녹음팀·장비팀·미술팀 등과 팀별 도급 계약을 맺는다. 도급 계약을 맺은 팀장들은 다시 팀원을 모집한다.
이한솔 이사는 “방송사가 직접 계약을 맺는 구조로 바뀌지 않으면 답이 없다”며 “해당 방송사 소속이 아니더라고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면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방송사가 책임지게 하는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것이 한빛센터의 목표”라고 말했다.
10월 26일 고 이한빛 피디 2주기 추모
지난 1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설립
“형이 경멸했던 환경 바꿔야 미안하지 않을듯”
“방송사의 스태프팀별 턴키계약 사라져야”
“드라마 현장 주100시간 살인적 노동 여전”
“이 바닥 원래 그렇다?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센터는 그동안 1인 시위를 하고 제보를 받고 방송사, 제작사에 공문을 보내는 등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더해져 9개월 만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씨제이이앤엠 자회사인 스튜디오 드래곤과 <한국방송> 자회사 몬스터 유니온, <에스비에스> 등이 한빛센터와 드라마제작환경 개선과 스태프 인권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며 ‘드라마 제작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1주 68시간 근로시간 제한을 준수하고, 이를 위해 비(B팀) 시스템을 적극 운영하는 등의 6가지 항목에 합의를 끌어냈다. 지난 9월에는 고용노동부가 전체 스태프 중 메인 감독급을 제외한 조수급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성과도 있었다.
그는 “(방송사·제작사와 도급 계약을 맺은 감독급 스태프는 사용자로 볼 수 있다며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점을 두고) 방송사가 감독급 스태프한테 책임을 전가할 우려는 된다”며 “스태프들과 방송사가 직접 계약을 맺도록 변화시키는 게 다음 단계”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다는 점이 여전히 발목을 잡는다. 이한빛 피디 죽음으로 관심이 쏠리자, 씨제이이앤엠이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등 방송사들은 숨죽였지만 그때뿐이었다. 지난해 12월 <화유기> 스태프가 추락사고를 당했고, 올 7월에는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스태프가 사망하는 등 인권과 산업안전에 직결된 사고들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9개월간 센터로 제보가 들어온 총 26개편의 드라마 현장 사례도 모두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관한 것이다. 그는 “한달에 5~6건씩 주요 방송사 모두에서 제보가 들어온 적도 있다. 하루 3~4시간밖에 못 자는 등 열악한 환경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사후대책밖에 마련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깝다. 문제가 심각했던 <나의 아저씨>를 포함해 많은 드라마들이 센터의 문제 제기 이후에야 결방을 하거나 비팀을 투입하면서 뒤늦게 스태프들의 쉴 권리를 보장했다.
한빛센터는 30일 씨제이이앤엠과 자회사 스튜디오드래곤 등 5개 제작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나인룸> <손 더 게스트> 등에서 스태프들을 1주일에 90~100시간 장시간 노동에 내몰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처음부터 비팀을 투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제작비가 없다거나, 연출자들이 다른 피디와 번갈아 찍는 것을 싫어한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적용해 처벌을 강화하거나 초과 노동에 대해 충분한 임금을 주도록 해야 한다.”
그나마 지난 5월 막 내린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이어 9월 끝난 <시간>이 ‘68시간’을 준수하는 등 근로 시간을 지키는 현장이 하나둘 늘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그는 “보통 4~6회 대본이 나온 뒤 촬영을 시작하는데, 그나마도 대본을 계속 수정하면서 촬영이 늦어진다. 최소한 8회까지는 대본이 완성된 뒤 촬영에 들어가도록 가이드라인으로 정착되면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빛센터는 씨제이이엔엠한테 받은 위로금으로 설립했다. “위로금을 받은 날 부모님한테 센터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그 돈을 딴 데 쓴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그는 대학생이었던 지난 2011년 창립 멤버로 참여했던 민달팽이유니온에서도 일하고 있다. 2012년 휴학하고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1년간 일한 경험도 있다. 형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자신의 인생까지 방송 노동자 문제에 다 걸어야 했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형과 스태프들의 일하는 환경을 바꿔야 형한테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루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2~3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려고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내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다.’ 고 이한빛 피디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형의 유지는 동생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어요. 사람을 봐주세요.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구요? 아뇨. ‘원래 그런 것’은 없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