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1.03 11:20 수정 : 2018.11.03 14:11

1994년 3·1절 특집극을 맡은 고석만은 박치문 바둑전문기자와 손잡고 조훈현 9단의 첫 국제 대국 제패를 소재로 ‘최초의 바둑 드라마’를 연출했다. 1989년 9월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잉창치배 세계 프로바둑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이튿날 귀국한 조훈현 9단은 바둑기사로는 처음으로 서울 종로에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환영을 받았고, 문화훈장도 받았다. 한국기원 제공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42회)
‘맞수-부목반의 비밀을 찾아서’

1994년 3·1절 특집극을 맡은 고석만은 박치문 바둑전문기자와 손잡고 조훈현 9단의 첫 국제 대국 제패를 소재로 ‘최초의 바둑 드라마’를 연출했다. 1989년 9월5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잉창치배 세계 프로바둑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고 이튿날 귀국한 조훈현 9단은 바둑기사로는 처음으로 서울 종로에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환영을 받았고, 문화훈장도 받았다. 한국기원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94년 3·.1절 특집극 <맞수>는 ‘임진왜란 직후 포로 송환을 위해 일본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의 이약사가 도쿄의 바둑 명문가 본인방에서 대국을 했다’는 기록을 소재로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씨가 소설 같은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본인방가문이 탄생한 교토의 적광사에 남아 있는 이약사의 글 ‘건곤굴’, 지금도 절의 현판으로 걸려 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보이는 힘은 보이지 않는 힘만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은 고요함만 못하다. 삼라만상의 묘한 것은 고요함에서 나온다.” 부목반(浮木盤) 아래 새겨진 임진왜란 직후 조선통신사 이약사의 글귀다. 일본의 ‘부목반’(물에 뜨는 바둑판)이라는 바둑판은 전설 같은 무수한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가 공개되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점에서 더욱 신비감을 준다.

1994년의 3·1절 특집극의 주제는 한일관계사 중에 정신적 교류가 깊숙한 ‘바둑’으로 잡았다. 스포츠 극일을 뛰어넘어 정신세계의 우위를 증명하고 싶었다. 오늘날 바둑으로 동북아를 제압하고 우뚝 선 ‘한국 바둑’이 오늘의 ‘3·1절 특집’으로 제격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연출 시절 첫 디렉팅을 연습한 프로그램이 <일요기원>이다. 조남철 선생이 해설을 맡아 진행했다. 그분의 귀한 경험담을 풍부하게 들었다. 나로선 조남철 선생께 일년 남짓 가르침을 받은 셈이다. 그분의 추천으로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을 만났다. 박치문 기자의 ‘오늘의 관심사’가 바로 ‘조훈현과 부목반’이다. 조훈현에게 그 비밀스러운 부목반이 바람처럼 찾아왔단다.

고석만 연출은 1971~72년 문화방송 <일요기원>의 조연출로 해설위원 조남철 명인에서 바둑을 배운 인연으로 94년 <맞수>를 만들게 됐다. 사진은 1972년 5월 5일 당대 최고수 조남철(왼쪽) 8단이 19살의 서봉수(오른쪽) 2단과 명인전 결승 대국 때, 서 2단이 우승하며 한국 바둑 세대교체가 시작됐다. 사진 한국기원 제공.
1971년 10월 문화방송은 국내 첫 바둑 해설 프로그램 <일요기원>을 매주 1회 방송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89년 9월 조훈현(왼쪽) 9단이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9단, 중국의 린하이펑 9단을 연파한 뒤 중국의 기성 녜웨이핑(오른쪽) 9단과 결승 대국을 펼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제공
조훈현, 1953년생. 지난 15년간 한국 바둑계를 이끌어온 외로운 황제. 한 시대를 풍미한 고수들은 많았으나 조훈현만큼 많이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로의 마술사’ ‘100년 만의 천재’라는 명성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고수들이 구름같이 몰려 있는 일본과 중국! 그곳에 비해 한국 바둑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조훈현은 홀로 세계의 강자들을 차례차례 꺾어나갔다. ‘그는 부드러운 바람이고 빠른 창이었다.’ 그러나 절정의 순간에 위기가 찾아왔다. 1989년 9월, 이틀 뒤면 싱가포르에서 ‘제1회 잉창치배(응씨배) 결승전’ 4국이 열린다. 상대는 중국 바둑계의 최강자 녜웨이핑(섭위평). 3국까지의 스코어는 1 대 2, 조훈현은 막판에 몰렸고 그의 30년 바둑인생은 추락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1989년 9월3일 조훈현(왼쪽) 9단과 녜웨이핑(오른쪽) 9단이 ‘제1회 잉창치배’ 결승전에서 도전 4국을 시작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제공
새벽, 북한산 정상에 올라선 조훈현은 앞에 솟아오르는 산만큼 거대한 검은 곰 한마리를 보았다. 천천히 검은 능선에 시선을 멈춘 조훈현, “지금 이 어둠 속에서 녜웨이핑을 보았다. 산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 한 자락이 능선의 모양을 갈라놓는다. 저건 힘일까? 고요함일까? 힘이라면 내가 잡을 수 있다. 고요함이라면?” 석상처럼 굳어지는 조훈현 앞에서 커다란 곰은 검은 산맥이 되었다가 깊은 계곡이 되어 사라진다. 이를 형상화했다. 당시로선 드라마 최초, 컴퓨터그래픽(CG) 이미지다.

녜웨이핑 9단, 1952년생. 어렸을 때는 수학박사! 중·일 슈퍼리그에서 일본의 고수들에게 무려 12연승을 거두며 ‘철의 수문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헤이룽장성의 노동자였다가 천부의 기개로 단숨에 세계를 흔들어버렸다. 바둑 사상 중국에서 ‘기성’ 칭호를 정식으로 받은 유일한 인물, 대륙적인 두터운 기풍에 강철신경을 지닌 ‘검은 산맥’이다.

1989년 9월3일, 싱가포르 스탬퍼드호텔 대국장. 우칭위안(오청원)의 심판으로 조훈현은 녜웨이핑을 상대로 제4국을 시작한다. <맞수>는 중계방송하듯 대국장 전체를 재현했다.

1994년 드라마 <맞수>에서 고석만 연출은 조훈현-녜웨이핑의 ‘잉창치배’ 결승 대국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1989년 9월4일 ‘잉창기배’ 결승전의 마지막 5국에서 녜웨이핑(왼쪽) 9단과 조훈현(오른쪽) 9단이 마주하고 있다. 2 대 2로 추적해온 조 9단이 소문난 골초답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드라마 <맞수>에서는 조 9단이 신비한 부목반의 기운을 받아 역전승을 거둔 것으로 연출했다. 사진 한국기원 제공
오전 10시 정각, 조훈현이 흑을 집어 우상귀 화점에 두는 순간 플래시 요란하게 터지고, 녜웨이핑 좌하귀 화점에 응수, 다시 터지는 플래시. 기자와 관계자들이 물러가자 조용한 긴장감이 감돈다. 옆방 검토실엔 기사 수십명과 기자들이 프레스센터처럼 대형 모니터를 지켜보며 해설, 언론사에 타전한다. 한쪽에선 한국기원에 팩스로 중계한다.

조훈현은 생각하고 있다. “제3착이 최초의 갈림길이다. 역시 여덟집의 덤은 너무 크다. 그것 때문에 승부 호흡이 흐트러지곤 했다. 여덟집의 덤, 이 대회의 보이지 않는 변수다. 덤이 크니 좀 더 강하게 좀 더 적극적으로…, 아니다.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2국 때는 완패했다. 이제 그 포석은 버려야 하는 것인가. 그간 어떤 포석으로 패하면, 그 뒤에도 이길 때까지 그 포석을 강행했었잖나. 승부사의 고집이다. 물러서면 안 된다. 겁을 내면 안 된다. 다시 한번 한다. 제3착이다.”

싱가포르의 9월은 덥다. 대국장은 뜨겁다. 긴장으로 두 사람은 살벌하기까지 하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바둑판에 빠져 있는 조훈현의 독백이다. “사막을 헤메고 있다. 끊임없이 밀고 흔들어봤지만 상대는 꼼짝하지 않는다. 간발의 차이였으나 좁혀지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이미 때가 늦었다. 아~ 지쳐 쓰러질 것 같다.” 조훈현에게는 멀리 검은 산맥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쫓아가면 다시 멀어지고 다가서며 잡으면 어둠이다. 조훈현은 산을 잡고 쓰러진다. 그때 계시원의 목소리, “조 선생, 초를 읽겠습니다”. 조훈현은 깜짝 눈을 떴다가… 다시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건 핏자국이었다. 승부란 누군가 쓰러지는 것! 이번엔 내 차례일 뿐이다. 아! 아! 잘라라! 내가 헤매온 바둑판 19로! 그곳의 허욕과 미망을 다 잘라라.” 신비로운 바둑판을 칼로 내려치자 바둑판은 쪼개지고…, 또 한번 계시원의 목소리 “조 선생, 마지막 1분입니다”.

조훈현의 독백, “나는 사라졌다”. 그리고, 조훈현의 145수! 다음 녜웨이핑의 표정은 평이하다. 그런데 응수를 않는다. 이상하다. 검토실의 린하이펑(임해봉)도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다. “왜 받지 않지? 여기 147을 받으면 그만인데….” 들리는 초읽기, 50초, 하나, 둘… 그때, 빗나가 버리는 녜웨이핑의 손, 146을 놓는다. 검토실의 우칭위안은 놀란다. 불안해하는 녜웨이핑, 바둑판을 뚫어질 듯 보고 있다. 맞은편 조훈현의 강렬한 눈빛, 팽팽한 대결, 두 사람의 머리가 공중에서 맞닿을 듯…, 기록자가 펜을 놓는다.

와~! 하는 함성소리, “흑 한점 승!” 조훈현의 승리다. 검토실의 함성은 서울의 한국기원에도 전해지고 언론사에도 일시에 타전된다. 환호와 갈채 속에 뜨는 기보. 한가운데 천원이 이채롭다.

1994년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소설 바탕
1989년 조훈현 ‘잉창치배 제패기’ 극화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국수’ 이약사
일본에 전했다는 ‘물에 뜨는 바둑판’
갑신정변 직후 망명한 김옥균 손에
1894년 홍종우에게 저격당한 뒤 ‘실종’

“부목반 100년 만에 조훈현 찾아오다”
중국 녜웨이핑과 ‘결승 대국’ 역전승
전설 바탕 ‘정신세계의 극일’ 표현

“삼라만상 묘함은 고요함에서 나온다”

싱가포르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맞는 조훈현. 호텔 옆으로 흐르는 달빛 받은 강, “강물은 왜 흐르기만 할까? 저 느긋한 녀석은 누구와 승부를 하는 걸까….” 달빛 속에 부목반이 교태롭게 물 위에 떠오른다. 밑판에 쓰인 이약사의 글이 보인다.

부목반은 막부시대 일본 바둑 4대 가문 중 최대였던 본인방가(1612~1938)의 가보였다. 제18대 본인방 ‘슈호’는 힘겹게 본인방 자리에 오르던 날 “부목반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고 전한다. 부목반은 곧 본인방을 상징하는 물건이었고 본인방가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었다. 부목반은 사람으로 치자면 ‘출생’이 불분명하다. ‘사망’은 더욱 아리송하다. 부목반은 어떤 연유에선지 19대 본인방 슈에이로부터 조선의 망명객 김옥균에게 맡겨진다.

해설: “2 대 2로 추격한 조훈현은 새벽 늦게야 가까스로 잠들 수 있었다. 쫓기는 녜웨이핑은 고민 속에 밤을 지샜다. 조훈현은 4국 때, 그러니까 한발 먼저 승부의 집착에서 벗어났으나 녜웨이핑은 갑자기 닥친 위기와 처절히 싸우고 있었다. 그의 강철신경은 휘어졌다. 정신력으로 겨루는 대국 전날 밤의 승부에서는 녜웨이핑이 졌다.”

드라마 <맞수>에서는 의문의 여인 서호(고소영)이 100년 전 김옥균의 암살과 함께 사라졌던 신비한 바둑판 ‘부목반’을 조훈현 9단에게 선물한다. ‘엠비시 가이드’ 제공
89년 9월4일, 최종 결승국.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명실공히 세계 최고수. 오전에 58수까지 두고 점심시간을 보냈다. 녜웨이핑이 들어서며 독백한다. “느리다. 너무 느리다. 덤이 여덟집이라지만 내가 너무 기다리는 건 아닐까. 흑집도 덤을 제하면 겨우 30집 정도다. 승부는 후반에서 낸다.” 조훈현은 점심으로 우동 한그릇을 먹었다. 그는 들어와 앉으며 생각한다. “오전 내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상대는 바로 등 뒤에 와 있었다. 엊저녁 부목반에서 읽은 ‘고요함’은 무엇인가.”

오후 1시, 개시 알리는 신호음이 울리고, 조훈현 무심하게 돌을 들어 59착.

해설: “바로 저 수다! 얼핏 살기 위해 두는 평범한 한수로 보인다. 그러나 조훈현이 점심시간 동안 결심한 ‘고요하여’ 보이지 않는 승부수! 상대가 반발하면 일대 난전이 불가피하다고 각오하고 있다.” 상대는 무심히 60 막고, 흑 61.

해설: “녜웨이핑은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이 승패를 가름한 중대한 고비였음을 녜웨이핑은 물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조훈현은 비로소 어둡고 긴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회광반조(廻光返照) 현상’을 보았다. 촛불의 마지막 불꽃, 그다음의 고요한 세계를 보았다. 점심때 구상한 3집의 수순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조훈현은 수만개의 꽃송이가 일시에 피어나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특집극 <맞수>는 박치문 기자가 원안 소설을 쓰고, 김지연 작가의 극본으로 90분 2부작을 만들었다. 이야기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바둑의 깊이를 더해야 한다. 촬영 직전 박 기자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짐을 싸들고 박 기자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 역시 결의를 다졌다. “모두 실눈 뜨고 보고 있다. 보란 듯이 만들자.” 골방에 둘이 앉아 밤을 꼬박 새우며 윤색하여 바둑의 현장을 살렸다. ‘작가 박치문의 세계’가 펼쳐졌다.

드라마 <맞수>에서는 조훈현 9단의 첫 바둑 세계제패를 계기로 조남철·김인·서봉수·조훈현·이창호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 현대사도 조명했다. 조훈현의 내제자로 동고동락하다 스승을 이기는 ‘돌부처’ 이창호(정준)의 극증 모습. ‘엠비시 가이드’ 제공

‘승부의 세계는 바퀴 달린 수레처럼 다시 구르고 있었다. 한국 바둑계가 용틀임을 시작한 것이다. 15년간 국내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다시 세계를 제패한 조훈현은 서봉수의 벽을 넘어 달려온 이들, 이창호, 유창혁이 그의 금빛 옷자락을 한쪽씩 쥐어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맞수>는 그들 4인방의 분투기를 그려나갔다.

대국실을 치밀하게 재현했고, 심리묘사를 위한 시지 활용도 앞서나갔다. 당대의 톱스타들이 경연을 펼쳤다. 한진희, 이재룡, 정준, 정성모와 신인 고소영이 빛났다. 그리고 정보석, 그는 서봉수의 손이라도 닮고자 서울대 바둑반장을 집으로 데려와 개인교습도 받는 열정을 보였다. ‘프로는 손끝만 봐도 급수를 안다.’

이듬해 ‘잉창치배 2회 대회 결승전’은 한국의 토종 실전류의 상징인 서봉수 9단과 ‘일본미학’의 대가 오타케 히데오 9단이 맞붙어 서 9단이 역시 프로 세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역전 끝에 우승했다. 꼼꼼하게 재현했다.

고수들의 게임을 이해하는 것부터 고통이 따랐다. ‘바둑은 하늘 위 신선의 놀이다.’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가 적광사에 ‘건곤굴’ 현판까지 걸고 온 이약사 같은 고수의 유전자가 있기에 한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는 점도 증명해 보였다. 아~!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함이여.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김옥균(1851~94)은 1884년 갑신정변 거사가 실패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 생활 10년 동안 숱한 정치적 활동을 하고 여자들을 만나 자식도 많이 낳고 두차례나 유배도 당한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따라가겠다는 추종자도 많았다.

김옥균은 홋카이도로 유배를 떠난다. 김옥균을 마중하러 배에 올랐던 본인방 슈에이는 차마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길로 홋카이도까지 함께 간다. 둘 사이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상상이 간다. 김옥균은 다시 남쪽의 머나먼 섬인 오가사와라로 유배된다. 당시만 해도 배로 한번 가는 데 한달이 걸리는 절해고도였다. 슈에이는 그곳까지 찾아가 한달 이상 머물다 왔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망명객과 쓰러져가는 가문을 지키려는 수장 사이엔 ‘비운’과 ‘비감’이란 가슴 시린 공통분모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본인방가는 쇠락해 더 이상 존립이 어려워졌다. 본인방 슈에이는 자신의 지기인 김옥균에게 이런 내용과 함께 부목반을 전하며 “나는 더 이상 가문과 가보를 지킬 수 없으니, 김옥균 그대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이 판을 이약사의 후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부목반을 둘러메고 중국 상하이로 떠났던 김옥균은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하고, 부목반은 곡절 끝에 한국의 조훈현 9단에게 전해졌다. 조훈현은 실제와 가상의 세계를 교차하며, 부목반 바닥에 쓰인 이약사의 글을 보았다.

“보이는 힘은 보이지 않는 힘만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은 고요함만 못하다. 삼라만상의 묘한 것은 고요함에서 나온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