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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15 09:59 수정 : 2018.12.15 17:48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미디어의 달라진 시선

흑인혼혈 연예인에 대한 오래된
차별, 차이, 온정의 시선 줄어들고
“그래 피부색 다르지, 그런데 뭐?”
함께 살아가는 한현민과 마주하기

공부는 힘들고 게임에 열광하고
‘인싸 문화’에 민감한 보통 청소년
평범한 ‘요즘 애들’로 나타나자
그만의 낙천적인 매력도 드러나

한현민은 또래의 ‘요즘 애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인싸’ 문화에 민감하고 게임과 운동에도 열광하는, 지극히 평범한 한국 청소년을 대변할 만한 인물로 출연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엠비시 에브리원 채널이 최근 선보인 수요 예능 <대한외국인>은 이래저래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범람하고 있는 외국인 예능이나, 13년 전 종영한 엠비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 ‘브레인 서바이버’(2002~2005)의 직계 후손을 자처하는 퀴즈 프로그램이나 어디를 봐도 크게 새로운 구석은 없는데, 이 뻔한 요소들을 합치자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매주 다섯명의 한국인 셀러브리티들이 한국에 거주 중인 열명의 외국인과 맞서 한국 문화와 관련된 퀴즈를 풀어본다는 구성을 두고 박명수는 “(한국인들이) 이겨도 본전, 지면 망신”이라 말했지만, 쇼가 9회까지 방영되는 동안 한국인 팀이 우승을 거머쥔 건 단 한차례뿐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덕에 한국과 관련된 지식을 자연스레 몸으로 익힌 한국인들과 달리, 외국인들은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한국어 문법과 한국 문화를 치열하게 공부해야 했던 이들이다. 외국인들의 승률이 높은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또래 청소년 대변하는 인물로 활약

<대한외국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박명수와 함께 한국인 팀의 고정 멤버로 활약하는 모델 겸 방송인 한현민의 존재다. “‘급식’(학교에서 급식으로 식사를 하는 이들, 즉 중고등학생을 지칭하는 은어)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치며 출발한 한현민은 그 큰소리가 민망하게 2~3단계쯤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이쯤 되면 왜 하필 프로그램의 공식 ‘구멍’의 롤을 나이지리아계 한국인 청소년에게 맡기는 걸까 하는 불편함이 들 법도 하지만, 한국인 참가자들 중 절반 가까이를 2~3단계에서 돌려보내는, 퀴즈의 난이도는 그런 불편함이 엄습할 틈을 주지 않는다. 프로그램 안에서 한현민의 부진은 그저 그가 피시방과 해외축구 뉴스에 열광하느라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낸 평범한 소년이라는 맥락으로만 설명된다. 덕분에 사람들은 한현민이 승률로 따지면 오십보 백보인 팀장 박명수에게 구박을 받으며 티격태격하는 광경을 큰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게 됐고, 한현민이 제작발표회에서 공언한 대로 <대한외국인>을 “한현민의 성장 드라마”로 소비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처음으로 4단계까지 진출한 9회쯤 되면 한국인 팀뿐 아니라 외국인 팀 멤버들까지 한현민의 선전을 응원하는 지경에 이른다.

제이티비시(JTBC)가 새로 선보인 예능 <요즘 애들>에 출연하는 한현민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현민은 김하온과 함께 또래 청소년을 대변하는 인물로 출연해, 안정환이나 유재석 같은 ‘어르신’들과의 세대 차이에 혀를 내두르는 역할을 한다. 자신을 명상 장인이라고 소개한 ‘요즘 애’ 장주영씨를 따라 명상을 하다가 좀이 쑤셔서 온몸을 들썩거리는 모습은 그냥 평범한 한국의 ‘요즘 애들’ 모습 그대로다.

한현민이 처음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2017년만 하더라도 한국의 미디어는 그의 피부색과 성장 배경과 같은 요소들에 주목했지만, 그 태도는 불과 1년 사이에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대한외국인>과 <요즘 애들>이 집중하는 건 한현민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과, 공부를 멀리한 탓에 듬성듬성 비어 있는 지식, 근거 없는 자신감과 은근한 승부욕, 게임과 운동에 열광하는 취향 등이 조합된 ‘현역 고등학생’의 유쾌함이다.

기존에 한국 사회가 흑인 혼혈인을 대하던 태도, 이를테면 가수 인순이나 한국계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 가수 소냐 등을 대하던 태도와 비교해보면 이런 변화는 흥미롭다. 한국의 미디어는 흑인 혼혈인을 대할 때 반복적으로 그들이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인종차별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집중해서 탐구했다. 이런 접근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 편견과 유무형의 차별을 상기하며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반성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온갖 부당한 고난을 헤치고 마침내 성공을 이룬 이들에게 합당한 찬사를 바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접근 방식은 상대를 손쉽게 연민하고 신파로 소비하기 좋은 소재로 착취하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수전 손택이 지적했던 것처럼, 연민이란 감정은 종종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흑인 혼혈인들이 겪은 고통의 서사를 듣고 손쉬운 연민을 느낌으로써, 내심 “이처럼 당신에게 연민을 느끼는 나는 당신을 괴롭게 했던 그 나쁜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감정을 확보하고 안도하는 것이다. 흑인 혼혈인을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선주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느껴야 할 책임감은, 연민을 방패 삼아 모습을 감춘다.

‘차이 극복’ 말할수록 부각되는 ‘차이’

무엇보다 이런 식의 ‘인간 승리’ 서사가 안 좋은 이유는, “나를 당신들과 동등한 한명의 한국인으로 대해달라”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본의 아니게 왜곡한다는 점이다. ‘차이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들이 ‘극복’해야 했던 ‘차이’, 즉 ‘한국 선주민인 우리’와 ‘흑인계 혼혈인 그들’ 사이의 차이점이 더 부각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공통점에 집중하는 대신 차이를 더 부각하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10여년 전쯤 어느 이동통신사는 노래 ‘거위의 꿈’을 부르는 인순이를 모델로 세운 ‘혼혈의 진실’이란 광고를 통해 혼혈인을 ‘다른 인종의 피가 섞인 사람’으로 보는 관점을 이동해 ‘다른 인종의 장점이 합쳐진 사람’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광고를 기획한 이들의 선의를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접근이야말로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을 부각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 선주민이든 혼혈 한국인이든 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선언하면 간단한 일을, ‘장점이 합쳐진 사람’이라며 애써 특별한 존재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한국 선주민 사회의 폐쇄성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그에 비하면 한현민의 존재와 그를 대하는 미디어의 태도는 썩 경쾌한 구석이 있다. 한국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호쾌한 신체비율과 검은 피부색이 한현민을 각광받는 패션 모델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차례 한국 사회 안의 인종차별과 편견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한현민의 입장을 확인한 이후부터, 한현민을 소위 ‘다문화’의 상징으로 부각하려는 시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대신 영어는 힘들고 공부는 지루한 평범한 고등학생(티브이엔 <나의 영어 사춘기>, 2017~2018)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잘나가는 ‘핵인싸’(강조를 위해 붙인 접두사 ‘핵’과 영단어 ‘인사이더’를 줄인 ‘인싸’의 합성어) 자격으로 등장해 ‘어르신’들에게 ‘인싸 포즈’와 ‘인싸 워킹’을 알려주는 소년(엠비시 에브리원 <비디오스타>, <요즘 애들>)으로, 박명수와 함께 한국인 팀의 예능을 책임지는 성장 서사의 주인공(<대한외국인>)으로 활약한다. 마치 “그래, 피부색이 좀 다르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라고 되묻기라도 하듯이.

물론 한현민을 대하는 한국 미디어의 태도가 개선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인종차별이 개선되었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최근 “한국의 인종차별 현실과 갈등이 국가적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과 2014년에 이어 벌써 세번째 경고다. 이주 노동자들과 난민, 무슬림 등 타자를 향한 한국 선주민 사회의 혐오와 공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불법체류자와 가짜 난민을 추방해야 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일삼는다. 한현민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만으로 낙관하기엔 상황이 너무 험악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 선주민들과는 그 피부색과 외모가 다른 이들이 자연스레 ‘한국인’으로 불리는 모습이 미디어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우리의 협소한 인식도 조금은 개선되지 않을까? 더 많은 이들을 ‘한국인’이라 부르고 함께 어울리다 보면, 언젠가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조상 대대로 한반도에서 살아온,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노란 피부를 가진, 한국 국적의 동북아시아인’으로만 생각하는 대신, 단순하게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국 국적을 지닌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그 공의 일정 부분은 공부와 담을 쌓은 핵인싸 급식 소년 한현민의 것이리라.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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