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7 19:19
수정 : 2019.09.27 19:22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1969년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시애틀 대학가 술집에서 싱글맘 리즈 켄들(릴리 콜린스)은 한 청년을 만난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리즈는 그가 자신의 어린 딸을 대하는 다정한 모습에 더 빠져든다. 두사람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집에 살게 되고 딸을 함께 키우며 평범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1974년 킹카운티 지역에서 젊은 여성들이 잇달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리즈는 신문에서 용의자 몽타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그림 속 얼굴과 그의 다정한 연인 테드 번디(잭 에프런)의 얼굴이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원제 ‘Extremely Wicked, Shockingly Evil and Vile’)는 희대의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테드 번디를 다루었던 기존의 무수한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가 검거되기 직전까지 동반자로 살았던 여성의 시점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그가 리즈 켄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 회고록 <팬텀 프린스: 테드 번디와의 삶>(원제 ‘The Phantom Prince: My Life with Ted Bundy’)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디 테이프>의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 조 벌린저가 연출을 맡았다.
리즈 켄들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서 테드 번디의 잔혹한 범죄 행각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미혼모가 되어 자식을 홀로 부양해야 했던 리즈 켄들에게 테드 번디는 믿고 의지해야 할 가족이었다. 미국을 불안에 떨게 한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 몽타주를 본 뒤, 리즈는 테드에 대한 의심을 키우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믿고 싶은 마음으로 갈등하게 된다. 이 작품은 리즈의 시점을 통해 너무나 잘 알려진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연인으로서 그의 또 다른 얼굴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연쇄살인범이 사회와 고립된 괴물이 아니라 얼마든지 ‘우리의 평범한 이웃’으로 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원제처럼 극도로 교활하고 충격적으로 사악하며 비도덕적인 테드 번디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은, 그가 체포된 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면서다. 법정 드라마로 전환된 작품은 그때부터 리즈의 회고가 아니라 모든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기억으로 들어간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에 중계된 재판에는 수많은 언론과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테드 번디는 직접 수석 변호사 역할을 맡아 무고를 주장하며 이 법정 쇼의 정점을 찍는다. 한편의 거대한 버라이어티가 되어버린 현장에서 피해자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또 다른 의미의 피해자였던 리즈 역시 티브이를 통해 재판을 지켜보는 위치로 물러난다.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는 근래 미국에서 범죄 실화를 다루는 ‘트루 크라임’ 장르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등장한 작품이다. 최근 호평이 쏟아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범죄 가해자 위주의 서사를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하지만 후반부부터 그 ‘새로운 관점’이 실종되고 다시금 테드 번디의 원맨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는 씁쓸한 아쉬움을 남긴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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