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구치 카이지라는 일본의 만화가를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그 역시 독특한 그림체와 세밀한 필치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만화가다.혹시 김경진의 전쟁 소설 시리즈를 보신 독자라면 가와구치 카이지의 만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경진의 소설을 보면서 막연하게 상상으로만 접하던 각종 전투함과 잠수함들,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 장면들을 생각하면, 가와구치 카이지의 만화를 통해 그 장면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진다.
가와구치 카이지는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그가 그리는 대표적인 장르는 '해군'과 관련된 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해군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십분활용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확실하게 전개시킨다. 가와구치 카이지, 왜 그의 만화는 늘 '화제작'이 되는 것일까?<침묵의 함대> 군비 폐기 후 세계 정부 수립?
만화 소개에 앞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최민수와 정우성이 주연으로 등장해 제작된 우리 영화 <유령>은 초반부의 전개가 <침묵의 함대>와 흡사해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표절 논쟁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시배트'는 일본과 미국이 합작으로 완성한 핵잠수함이다. 하지만 이 배의 함장인 '가이에다'는 미일합동군사훈련 도중 미국 측 감시인을 억류한 채, 이 배를 탈취해 바다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다.
그 이후로 '가이에다'는 좁게는 미국 정부와, 넓게는 대부분 핵을 소유하고 있는 5대 강국과 처절한 전쟁을 벌인다. 이 처절한 전쟁에는 본격적인 해저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매력도 독자에게는 대단히 흥미진진하지만, '가이에다'가 '시배트'의 독립 선언과 함께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배가 국가임을 선포하면서 벌어지는 세계 각국 정상들 간의 정치적인 수싸움이 더욱 압도적이다.
'야마토'라는 극우 냄새 물씬 풍기는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침묵의 함대>는 독자들 사이에서 격론이 일어날 정도로 가와구치 카이지가 이끌어내는 이야기 역시 극우적이다. 얼핏 봐서는 '가이에다'가 주장하는 '군비 폐기 후 세계 정부 수립'이라는 명제가 '가이에다'를 코스모폴리탄으로 보이게 하는 면이 있지만, 그가 내심 이끌어내는 결론은 '강한 일본' 혹은 '주체적인 일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와 핵 질서에 전면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일본의 현실에 본질적인 불만을 느낀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서 '가이에다'가 언급하는 로마식 통일 방식의 '침묵의 함대론'과 마주치게 된다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반란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저지선을 뚫고 UN에 입성한 '가이에다'의 연설, 특히 그가 강한 어조로 강조했던 마지막 한마디를 확인하면, 일본의 만화나 문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본인 특유의 천진난만함(?) 역시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해군의 실제 전투지침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전신(戰神)'인 양 거의 매번 승리를 거두는 '가이에다'의 놀라운 전투 지휘 역량 역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구석도 있다.<지팡구>, 만화판 <최후의 카운트다운>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최후의 카운트다운(1980)>이라는 영화가 있다.
미 해군 소속의 항공모함이 기이한 기상 현상에 휩쓸려 1941년 12월 5일로 가게 된다는 이야기의 영화다. 만화 <지팡구>는 <최후의 카운트다운>의 설정과 비슷하게 시작된다. 만화 <지팡구>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는 배는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의 최신식 이지스 구축함 '미라이'다.
이 원인모를 사태에 선원들은 곧 열띤 논쟁을 벌이지만, 해군 소좌 '쿠사타 타쿠미'를 구조하면서 본의아니게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지팡구>는 이렇듯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아돌프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의 실제 인물들을 다수 등장시켜 그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다.가와구치 카이지는 이 만화를 통해서 특유의 '카타르시스'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최신식 이지스 구축함이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가 당시의 일본군을 도우면서 미군을 격파하는 장면은 일본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짓눌린 역사를 간직한 우리로서는 <침묵의 함대>와 마찬가지로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와구치 카이지의 만화는 그가 전개하는 불편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만화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에 가까운 매력을 준다.
특히 <지팡구>에서는 1940년대를 살았던 일본인으로서는 '괴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미라이'를 놓고 '미라이' 측 승무원들과 벌이는 암투 역시 상당한 흥미를 제공한다. 가와구치 카이지, 그의 '준비 정신'을 주목하며그는 늘 일본의 현실과 역사를 이야기한다. 대지진의 여파로 두 조각난 이후의 일본을 그린 <태양의 묵시록>을 보면 그가 바라보는 일본의 현실과 미래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로서는 '극우'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주장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우리가 모르는 일본의 현실과 치열한 국제 질서의 전개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위해 등장시키는 세밀한 군사적 지식과 함께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안겨주는 만화적 재미를 특히 주목하고 싶다.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를 언급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한국에 출간된 보수 성향이 짙은 일본의 만화들은 '유혹'에 가깝다. 우리가 이런 류의 만화를 지켜보면서 배워야 할 점은 그 '유혹'을 이끌어내는 치밀한 준비다. 누구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려면 타당한 근거와 뒷받침할만한 자료 제시 등이 필요한데, 정치든 일상이든 우리는 이런 필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나로서는 우리의 그런 현실을 바라보며, 불편해보이는 주장마저도 치밀하게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의 준비 정신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만화라고 가볍게 보지 말자. 이미 그들은 만화를 통해 '논리'를 이끌어낸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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