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스펜스(샘 셰퍼드)는 30년 전 부모를 떠나 서부영화의 스타가 된 뒤 단 한번도 부모를 찾지 않았다. 서부영화를 주름잡던 시기에 짧지만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연인 도린(제시카 랭)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술과 마약, 여자에 취해 신문과 잡지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흥청망청 세월을 보냈다. 하워드는 여전히 서부영화에서 필요로 하는 배우지만, 서부영화는 대중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이제 하워드는 부모와 연인에게 ‘돈 컴 노킹’(노크하지 마시오)의 자세를 취했던 것처럼, 제작자와 감독의 요구를 무시한 채 촬영장으로부터 도망쳐 ‘떠나온 곳’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원하지 않는 것,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 비겁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은 도망가기다. 그런 의미에서 하워드는 ‘카워드’(비겁한 사람)다. 잘 나가던 시절 부모로부터 도망친 하워드는 쇠락한 서부영화를 등진 채 다시 부모에게로 도망친다. 어머니(에바 마리 세인트)는 질책 한마디 없이 아들을 품어주고, 오래 전 몬태나 뷰트에서 만난 아들의 연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워드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구식 자동차를 끌고 한때 흥했으나 이제는 쇠락한 도시 몬태나 뷰트를 찾고, 이 곳에서 옛 연인 도린과 자신의 아들 얼(가브리엘 만)을 만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또다른 연인이 낳은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딸 스카이(사라 폴리)도 만나게 된다.
황량한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하워드의 여행은 그가 외면하고 도피했던 황폐한 과거와 마주하는 여행이며, ‘과거’로부터 용서를 구하고 이를 통해 현재와 화해하는 방법이다. 누구도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았던 하워드가 자신이 내던져버렸던 과거와 과거의 사람들에게로 돌아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설정은 ‘대가없는 면죄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돈 컴 노킹’하던 그가 먼저 노크하자 다시 쉽게 곁을 내어주는 어머니와 연인, 자식, ‘가족’들의 모습에서 ‘가족은 봉이다’라는, 낡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는 판타지가 느껴진다.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 등을 연출한 빔 벤더스 감독이 퓰리처상 수상 극작가이자 배우인 샘 셰퍼드와 <파리, 텍사스> 이후 20년만에 다시 뭉쳐 만든 영화다.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작이며 유럽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했다. 23일 개봉.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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