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에도가와 케이시의 만화<20세기 소년>의 표지, 현재 20권까지 발간
<마징가 Z>와 <로보트 태권 V>, <매칸더 V>와 <우뢰매>, 그리고 <지구의 용사 선가드>와 <무적의 용사 다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등장했던 저 대형 로봇들은 확실히 말도 안 되는 존재들이다. 저 로봇들은 초대형으로 제작돼 아예 각종 미사일과 레이저 광선을 쏘면서 지구를 노리는 외계 악당들을 물리친다. 특히 <지구의 용사 선가드>와 <무적의 용사 다간>을 조종하는 주인공인 '한불새'와 '장민호'는 어린이란다. 지구의 안보를 어린이들이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이 말도 안 되는 환상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는다. 풍부한 꿈을 통해 상상의 폭을 넓히는 것은 물론이고,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구분을 통해 정의가 뭔지도 깨달아간다. 악을 용서치 않고, 늘 어린이들과 함께했던 그들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주었다.
그런데 어린 날의 저 아득했던 꿈들이 경우에 따라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금 이야기할 만화들은 어린 날의 순수한 꿈을 '지옥'으로 이끌어내는 만화들이다.
<20세기 소년> 어린 날의 상상이 끔찍한 현실이 된다면? 우라사와 나오키&에도가와 케이시의 만화 <20세기 소년>은 1970년대 초의 일본을 무대로 저마다 다른 현실 속에서 그래도 맑게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뼈대로 진행된다. 이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그들만의 '비밀 기지'를 만들면서 상상에 기반을 둬 즐겁게 짜낸 아이디어들을 모아 '예언의 서'라고 기록해둔다. 이 '예언의 서'대로라면, 그로부터 30년 후의 지구(서기 2000년)는 외계인의 바이러스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리지만, 자신들의 맹활약으로 지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지구는 이때부터 종잡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예언의 서'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사람이 원인 모를 죽임을 당하던 서기 2000년 초의 '피의 그믐날' 이후로 그들은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예언의 서'를 실천하던 '친구'를 막아내기 위해서다. 물론 '친구'는 누군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그들이 만든 마크가 그려진 가면 속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리더 격인 '켄지'는 불행히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은 채, '친구'에 의해 죽게 되고, '친구'는 안타깝게도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됐다. '친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켄지를 잃은 그들은 '켄지'의 조카인 '칸나'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뭉치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정확한'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발간이 드물게 이루어지면서 독자들을 애태우고 있다. 내가 만화 비평을 쓰면서 줄거리 요약이 이렇게까지 힘든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20세기 소년>의 줄거리는 복선이 여기저기 얽혀 있고, 활용 폭도 넓다. 게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등장인물이 늘어나면서 캐릭터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체도 꽤 어려운 일이 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소년>은 이렇듯 특유의 이야기 구조가 압도적으로 와 닿는다. 캐릭터들에는 저마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특유의 긴장감 있는 무게가 부여돼 있으며,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친구'의 정체를 놓고 논쟁을 하게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진행이 가장 큰 장점이다. 여기에 부여된 많은 수수께끼의 의미 역시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생각하게 하는 만화'인 것이다. 일본의 어느 영화감독이 <20세기 소년>의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도저히 원작만큼 잘 만들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시도를 접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20세기 소년>은 웬만한 영화 이상의 스릴을 안겨준다. 혹시 아직도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 여기는 어른들이 주변에 있다면, <20세기 소년>을 추천해보자. 그 선입견이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무너지는 것을 느끼도록 말이다. 물론 절대 '대충' 읽어서는 안 된다. 대충 읽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지어스> 정의의 용사, 과연 꿈같은 황홀함만 있을까?
단행본 발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화다. 이 만화는 방학을 맞아 자연탐사를 떠난 중학생들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제안이란 다름 아닌 '지구를 지키는 정의의 용사'가 되라는 것. 지구를 지키기 위해 로봇을 조종해보라고 한다. 아직은 어린 날의 환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을 그들이 장난 같은 이 유혹을 이겨내기란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의 용사'란 그렇게 꿈 같은 일만은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른의 유혹으로 게임을 하듯이 로봇에 탑승한 이들은 결국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로봇은 조종하는 이의 생체 에너지로 움직인다. 즉, 임무를 다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설마 싶었지만, 설마가 사람 잡았다. 가장 먼저 로봇을 조종했던 '와쿠'는 정말로 죽게 된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차례로 로봇을 조종해 외계 괴물도 물리쳤건만, 로봇은 사정없이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간다.
<지어스>는 이렇듯 로봇을 지휘하면서 죽게 되는 중학생들을 통해 사춘기에 이른 청소년들의 고민과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지어스>는 로봇 조종 과정의 액션보다는 이들이 그동안 걸어온 길이나 가정 형편 등의 현실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마니아들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데다가 허무의 정서가 짙게 깔렸다며 상황 설정 자체를 비판하고 있다. 이래서야 긴장감을 느끼기가 힘들다는 이유다.
'조종 후 사망'이라는 큰 전제가 한치 어긋남 없이 실현되고 있으니 그 말도 무리는 아닌듯 싶다. 게다가 등장인물도 한 둘이 아니다. 모두 15명이다. 마니아들은 15명 모두를 비슷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물론 이 만화는 이제 겨우 3권이 발행됐다는 점에서 아직 기대를 접기는 이른 것 같다. 내 생각에 작가도 마니아들의 기대를 알고 있다면, 그 전제를 15번이나 반복할 리는 없다고 본다.
또 지금까지 사망한 2명의 중학생들의 조종 과정에서 흐르는 그들의 사연 역시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매력이 아주 없지는 않은 편이다. <지어스>가 마니아들의 기대를 알고 있다면, 마니아들을 이야기에 몰입시킬 '복선'에 대한 이야기를 슬슬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었을까?
사춘기에 접어든 탓인지 등장인물들의 상당수가 냉소적이고 눈빛이 죽어버린 <지어스>와는 달리 <20세기 소년>의 등장인물들은 치열하다.
자신들의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친구'의 만행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끄럼만 타던 소심한 인물의 전형이었던 '요시츠네'는 '켄지'와 '오쵸'가 없는 사이에 저항조직을 이끌면서 변해간다.
결국, 이 만화들은 우리가 고달픈 현실 속에서 그 시절의 순수했던 기억을 잊고 사는 우리에 대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그려내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 날의 우리는 만화 속의 로봇을 보면서 늘 전율했고, 늘 환호했다. 다양한 감정의 표현과 함께 반드시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듯 즐거움이나 각성, 혹은 각오가 사라지지 않은 인생에는 공백이 없다.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행복이 주로 어린 시절에 많은 것도 그와 무관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어스>는 그 상황 설정의 문제와 함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20세기 소년>은 특유의 넓은 폭의 이야기가 다양한 감상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만화들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20세기 소년>에 대해 독자들이 그렇게도 궁금해하는 '친구'의 정확한 정체나, 궁지에 몰린 <지어스>의 중학생들을 위한 해답 역시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그 시절의 상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의 눈빛에 세상에서 가장 명쾌한 진리가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20세기 소년> 어린 날의 상상이 끔찍한 현실이 된다면? 우라사와 나오키&에도가와 케이시의 만화 <20세기 소년>은 1970년대 초의 일본을 무대로 저마다 다른 현실 속에서 그래도 맑게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뼈대로 진행된다. 이 아이들은 공터에 모여 그들만의 '비밀 기지'를 만들면서 상상에 기반을 둬 즐겁게 짜낸 아이디어들을 모아 '예언의 서'라고 기록해둔다. 이 '예언의 서'대로라면, 그로부터 30년 후의 지구(서기 2000년)는 외계인의 바이러스 침략으로 멸망의 위기에 몰리지만, 자신들의 맹활약으로 지구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지구는 이때부터 종잡을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바로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예언의 서'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사람이 원인 모를 죽임을 당하던 서기 2000년 초의 '피의 그믐날' 이후로 그들은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예언의 서'를 실천하던 '친구'를 막아내기 위해서다. 물론 '친구'는 누군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그들이 만든 마크가 그려진 가면 속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리더 격인 '켄지'는 불행히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은 채, '친구'에 의해 죽게 되고, '친구'는 안타깝게도 세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됐다. '친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켄지를 잃은 그들은 '켄지'의 조카인 '칸나'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뭉치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정확한'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발간이 드물게 이루어지면서 독자들을 애태우고 있다. 내가 만화 비평을 쓰면서 줄거리 요약이 이렇게까지 힘든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20세기 소년>의 줄거리는 복선이 여기저기 얽혀 있고, 활용 폭도 넓다. 게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등장인물이 늘어나면서 캐릭터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체도 꽤 어려운 일이 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소년>은 이렇듯 특유의 이야기 구조가 압도적으로 와 닿는다. 캐릭터들에는 저마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특유의 긴장감 있는 무게가 부여돼 있으며,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친구'의 정체를 놓고 논쟁을 하게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진행이 가장 큰 장점이다. 여기에 부여된 많은 수수께끼의 의미 역시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생각하게 하는 만화'인 것이다. 일본의 어느 영화감독이 <20세기 소년>의 영화화를 시도했지만, 도저히 원작만큼 잘 만들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시도를 접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20세기 소년>은 웬만한 영화 이상의 스릴을 안겨준다. 혹시 아직도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 여기는 어른들이 주변에 있다면, <20세기 소년>을 추천해보자. 그 선입견이 한쪽에서 조심스럽게 무너지는 것을 느끼도록 말이다. 물론 절대 '대충' 읽어서는 안 된다. 대충 읽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지어스> 정의의 용사, 과연 꿈같은 황홀함만 있을까?
키토 모히로의 만화 <지어스>의 표지, 현재 3권까지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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