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우주연상을 받은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왼쪽)과 여우주연상 수상자 리즈 위더스푼.
몰아주기 관행 벗은 아카데미상
올해 아카데미는 큰 화젯거리를 만들지 않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5일(현지시각) 열린 78회 오스카상 시상식은, 여차하면 한 작품에 트로피를 몰아줘온 예년의 관행과 달리 <브로크백 마운틴> <크래쉬> <게이샤의 추억> <킹콩> 4편에 똑같이 3개씩 트로피를 나눠줬다. 2년전만 해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 11개의 상을 몰아줬던 것과 대조적이다.
가장 큰 이변은 최우수작품상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치고 <크래쉬>에 돌아간 것이다. 대만 출신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영국 아카데미상은 물론, 골든글로브상을 포함해 미국 내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10개가 넘는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당연히 오스카에서도 가장 유력한 작품상 후보로 점쳐졌지만 <브로크백…>은 감독상과 각색상, 작곡상을 받는 데 그쳤다. 예상밖의 행운아가 된 <크래쉬>를 두고 <에이피>는 81년 <레즈>를 제치고 작품상을 받은 <불의 전차>, 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물리치고 같은 상을 받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과 함께 ‘오스카 이변의 역사’에 올려야 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크래시’, ‘브로크백…’ 제치고 독립영화로 이례적 작품상
남녀주연상 처음 후보 오른 호프먼·리즈 위더스푼 차지
이쯤 되면 아카데미가 최초로 아시아인 감독에게 감독상은 주더라도 그의 영화에 작품상까지 몰아주면서 그를 스타로 부각시키는 것은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올 법하다.(작품상은 제작자가 받지만 대체로 이 상으로 더 영예가 올라가는 건 감독이기 쉽다.) 하지만 절묘하게도 이 영화 대신 상을 거머쥔 <크래쉬>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세지를 담은 영화다. 더욱이 아카데미가 작품상을 주는 일이 드문 저예산 독립영화이고 보면, 아카데미를 ‘인종차별자’로 몰아부치기는 힘들어 보인다. <크래쉬>는 제작비 뿐 아니라 다수의 주인공들의 사연이 저마다 다른 길로 펼쳐지다가 한 곳으로 모이는 그 형식도 다분히 독립영화적이다.
작품상은 못 받았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올해 오스카 공로상을 받은 노장 로버트 알트만 감독도 한번도 받지 못한 감독상을 거머쥔 최초의 아시아인 감독 리안(51)은 할리우드 주류 가운데서도 소수정예의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그의 감독상 수상 소감은 그의 영화처럼 담백했다. 그는 영화 속 두 남자 주인공 ‘잭’과 ‘에니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그들은 사랑 자체의 위대함을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한 뒤 마지막에 “대만, 홍콩, 중국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번 시상식은 <크래쉬>에 작품상을 준 것 외에도 몇몇 상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카포트>로 처음 주연을 맡은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에게 남우주연상을 줬고, 여우주연상의 리즈 위더스푼, 여우조연상의 레이첼 와이즈 처럼 처음 후보에 오른 이들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남녀주연상 처음 후보 오른 호프먼·리즈 위더스푼 차지
5일(현지 시각) 열린 제 78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크래쉬>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폴 해기스(감독 겸 프로듀서, 맨 왼쪽)와 캐시 슐만(프로듀서, 맨 오른쪽)이 시상자 잭 니콜슨을 사이에 두고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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