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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천상의 소녀가 남긴 것

등록 2006-03-10 17:08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최초로 제작되었다는 아프가니스탄 영화 [천상의 소녀]를 오랜 망설임 끝에 보고 왔다. 이 영화를 망설였던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인데 탈레반 정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정당화 시키는 것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이 영화를 극찬하고 참모들에게도 적극 권했다는 일화는 이런 우려를 더하게 하였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그것이 기우 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세디그 바르막 감독은 전쟁을 둘러싼 국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한채, 그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들은 일을 할 수도, 교육을 받을 수도 없는 탈레반 정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정치는 모른다, 하지만 일을하게 해달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여성들이 거리에 나서지만 그녀들에게는 가혹한 탄압만이 있을 뿐이다. 그 시위대의 옆을 병원일을 몰래 도우며 살아가는 어머니와 한 소녀(나중에 오사마라고 불리는)가 스쳐지나 간다.

할머니와 어머니, 이렇게 여성 3대가 함께 사는 소녀의 집은 '합법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남성이 없다.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가 몰래 환자를 돌보고 받은 돈으로 겨우 세식구가 연명하고 있는데 결국 이마저 힘들게 되면서 소녀의 가족은 당장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여기서 시작 된다. 여성에게는 경제 활동은 물론 대외활동 조차 금지되고, 자동차나 자전거 등 운송수단도 탈 수 도 없는, 모든 신체를 가려야만 밖으로 나갈수 있는 이 극단적 모순들, 그리고 지독한 가난과 절망은 이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것이나 그 극단에 서면 우리에게 독이 됨을 회교 근본주의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할머니는 살기 위해서 소녀에게 남장을 시켜 일을 하게하고, 이제 '소년'이 된 소녀는 식료품가게에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을의 모든 소년들이 탈레반 군대 교련을 위한 학교에 소집되고, 남장을한 소녀도 끌려가게 된다. 여자라는 의심을 받는 그녀를 위해 위일한 친구 에스판디는 '그 앤 남자야, 이름은 오사마야!'라고 외치지만 결국 교관에게 사실을 들키고 만다.(영화의 원제가 [오사마]이다.) 그리고는 죽음의 문턱에서 욕정 가득한 한 노인의 후처가 되면서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날 저녁, 천천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 노인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는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 현실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하는 소녀를 보여준다. 그녀를 남장시키며 머리를 자르던 할머니는 무지개를 지나면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무지개는 희망을 상징함이 분명하지만 결코 그 넘어의 삶이 행복할 것이라 확인시켜주지는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탈레반 정권의 실상은 여성에게 폭압적이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적이지만 그 모순과 차별을 깨뜨리는 것만이 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조건은 아닌듯 하다. 어딘가 있을 무지개를 찾아 남자가 된다고해서 소녀가 행복해 졌을까... 감당할 수 없는 생활고를 책임지는 고단한 노동에 지치거나, 전쟁의 희생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다시말해서 성차별은 이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지만, 이 차별이 철폐되는 것이 이 모순의 해결책은 아닐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있는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지개의 일화는 이를 잘 대변해 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고된 노동에 지친 소년이라면 그 굴레를 벗어 버리고자 무지개를 통과하여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 반면에 당장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인 소녀는 무지개를 통과하여 일 할 수 있는 소년이 되고자 할 것이다. 결국 희망의 무지개를 통과한들 그 이면에는 또다른 절망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단순히 성만을 바꾸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희망의 증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잘린 머리카락을 화분에 심는 소녀를 보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꿈꿔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긴 머리를 소중히 화분에 심듯, 여성이 여성성을 인정받으며,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 나아가 사람으로 태어나 성이나, 종교, 정체성의 차이에 관계 없이 적어도 고유한 인권을 존중받고 키워 나갈 수 있는 사회... 소녀가 화분에 심은 꿈은 아프가니스탄의 미래이며 또한 우리의 현재이어야 할 모습이다.

이 영화는 비전문 배우들로 만들어 졌다. 오사마역의 마리나 골바하리는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고 에스파디역의 아리프헤라티는 개를 팔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 역의 배우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연기가 아닌 그들의 삶 자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감독은 이 영화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고 토로하였다. 세상의 변화는 더디다. 그렇다면 탈레반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살만한 세상을 맞았을까...? 그 누구도 긍정 할 수 없을 것이다. 끌려간 오사마를 지켜보면서 울며 학교를 뛰쳐 나간 에스판디의 뒷모습이 가슴 아프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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