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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영화] 조선족 여인이 짊어진 ‘침묵의 무게’

등록 2006-03-22 23:00수정 2006-03-22 23:02

‘망종’
재중 동포 감독 장률의 두번째 장편 연출작 <망종>은 중국에 사는 조선족 여성이 주인공이다. 한국인이면서 동시에 중국에서 나고 자란 중국인이기도 한 장 감독은 정체성의 문제를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조선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고된 짐을 지고 살아가는 주인공을 묵묵히 응시한다.

감옥간 남편과 어린 아들을 둔 최순희(류연희)는 김치 행상을 하며 근근히 생활한다. 집에서 담근 김치를 자전거에 싣고 공안의 감시 눈길을 피해 다니는 것이 전부처럼 보이는 강퍅한 그의 일상에도 작은 행운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아들 때문에 알게 된 남자는 자신이 일하는 식당의 김치를 공급해달라고 하고, 경찰인 단골 총각은 그가 노점상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좀처럼 말이 없는 최순희의 힘겨움과 외로움을 이해해주는 조선족 중년 남성이 나타난다.

<망종>의 배경은 모래바람 이는 공사장과 폐허처럼 버려진 집이 황량하게 펼쳐진 베이징 근교 소도시다. 첫 연출작 <당시>의 등장인물들만큼 유령같지는 않지만 <망종>의 인물들도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 같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회색빛 포도 위에서 자전거를 세워놓고 우두커니 서있는 최순희는 시종 무표정하다. 그건 아무런 자원을 가지지 못한 그가 출구 없는 세상과 대적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세상은 그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일자리를 줄 것 같던 남자는 그에 상응하는 육체적 보상을 요구하고, 노점상 허가증을 준 경찰은 죄의식없이 그를 강간하며, 그에게 의지가 됐던 남자는 아내에게 매춘부에게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며 최순희를 최악의 궁지로 몰아넣는다.

사연을 열거하자면 의지할 곳 없는 여인네의 기구한 인생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여인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자기 삶의 마지막 근거를 잃어버리고도 표정이 바뀌지 않는 여인보다 무뚝뚝하다. 최순희가 당하는 사건과 슬픔의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거나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거나 값싼 동정을 하기보다 황량한 삶의 풍경과 긴 침묵을 견디어 낼 것을 요구한다. ‘망종’은 보리를 베고 볍씨를 뿌리는 절기를 뜻한다. 보리를 베지 않으면 볍씨를 뿌릴 수 없듯이 절망을 베어내고 그 자리를 응시할 수 있어야 희망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리밭으로 멀리 걸어가는 최순희를 보며 무슨 희망이 남아 있을까 질문한다면 아직 우리는 이 영화가 전하려 하는 침묵의 무게를 버텨내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24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두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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