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테이프 보낸 범인은 누구?
‘피아니스트’ 하네케 감독의 스릴러
‘피아니스트’ 하네케 감독의 스릴러
부르주아 지식인의 이중성은 프랑스 영화가 자주 다뤄온 소재다. <타인의 취향>의 아네스 자우이 같은 감독은 그들의 오만함과 허영심을 코믹하게 풍자했고, <의식>의 클로드 샤브롤 감독은 사회적 문제에선 계급적 편견을 경계하려 하면서도 막상 개인적으로 계급적 약자와 부딪혔을 때 훨씬 더 심한 편견을 드러내는 그들의 모습을 비극적 스릴러의 틀 안에서 중계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미카엘 하네케(64) 감독이 이 문제에 손을 댔다.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도-마조키스트적 유희와 파국을 다룬 2002년작 <피아니스트>를 통해 하네케는 냉정하고 냉혈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부학적 시선을 한국에도 알린 바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히든>은 하네케답게 지식인의 이중성을 다루면서, 차갑기 그지 없는 샤브롤의 방식을 택한다. 조르주(다니엘 오테유)는 방송사의 지적인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로, 팬들도 많다. 그의 집으로 발송인 미상의 비디오 테이프가 전달된다. 틀어보니 몇시간 동안 그의 집 앞을 죽 찍었다. 몇차례 더 비디오테이프가 오고 사람 목이 잘려 피가 흐르는 그림까지 동봉된다. 조르주는 직감적으로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집사의 아들 마지드를 떠올린다. 마지드와 함께 살기 싫어서 그에게 뭔가 못된 짓을 했던 조르주는 테이프가 마지드의 보복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테이프에 담긴 힌트를 따라 찾아간 곳에 마지드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드가 테이프를 보냈다는 증거는 없으며 마지드 스스로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의 구성 안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건 추리의 단서이기보다 갈수록 객관적 판단력을 잃어가는 조르주의 모습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나쁜 짓을 떠올리기 싫다. 또 떠올려봐도 그게 이런 협박을 당할 만큼 나쁜 짓이었다고 인정하기 싫다. 그는 마지드를 범인으로 보기 힘든 정황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를 범인으로 단정한다. 그 다음부터는 분노다. 분노는 추리력을 버리게 만들고, 그게 다시 분노를 키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히든>을 개인적 죄의식에 대한 영화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곁가지를 친다. 하나는 조르주의 부인 안느(줄리엣 비노쉬)이다. 안느는 조르주가 객관적 판단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안느에겐 자기 불안을 진정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릴 적 사연을 감추려 하는 조르주를 책망하기 바쁘고, 자기 친구들에게 하소연하면서 위로받는 일에 몰두한다. 조르주가 깊은 조언을 구하려 할 때, 안느는 집에 와 있던 친구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 짧은 시간에 조르주는 말할 의욕을 잃는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예의 같은 문제를 따지는 중상층 가정의 형식성이 그 구성원을 구제할 길을 봉쇄하는 메카니즘의 묘사가 절묘하다. 또 하나의 곁가지는,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알제리인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었던 61년 10월 파리 대학살이다. 영화는 조르주의 어린 시절 사연을 통해 이 역사적 상처에 끈을 댄다. 이를 통해 중상층 지식인 가정의, 나아가 프랑스 현대사의 이중성에 대한 환기로 외연을 넓힌다. <히든>은 <피아니스트>에 비해 메세지가 분명한 편이고, 사회적 함의도 구체적이지만 그 냉정함은 마찬가지이다. 지식인들, 어쩌면 스스로 구제할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이 바로 그들인 것같다. 23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스폰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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