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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가족, 희망이 보입니까?

등록 2006-03-27 15:49수정 2006-03-27 15:57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우리 시대, 가족 제도에 대한 일격 우리는, 혹은 우리 곁의 수 많은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어머니로, 아내로, 그리고 딸로서 이름 없이 살아왔다. 현재에도 역시, 여성의 사회 진출이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고 다양해 졌지만 다수의 인식 저변에는 여성의 본연의 역할이 우리의 어머니이고 아내이고 누이이며 딸이라고 믿으며 공공연히 가족으로의 회귀를 강요하기도 한다. 여전히 여성을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자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들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인 “생산과 모성”이 완전 사회화 되지 못한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경우에는, 성원의 대다수가 가부장적 가족 제도 속에서 교육을 받으며 1차 사회화의 과정을 거쳤고, 현재 많은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제가 굳건히 존속되고 있는 특수성에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여성을 억압하고 때로는 착취하는 구조를 고수하는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어떻게 볼 것이며 과연 이를 대체할 가족의 모습은 무엇일까? 여기 그 해답은 아닐지라도 가족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는 두 편의 영화를 소개 하고자 한다.

여성의 연대에 관한 따뜻한 시선 <안토니아스 라인>

<안토니아스 라인>은 83년, 역시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의 분노를 파괴적으로 표현한 <침묵에 관한 의문>으로 데뷔한 여성 감독 마린 고리스의 96년 작으로 이런 여성문제의 해답을 명쾌하고 즐겁게 보여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여성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않고 어떠한 전선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생활 속에서 여성이 누릴 수 있는 평등의 상을 보여주며, 삼대에 걸친 여성의 당당한 삶을 조명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네덜란드의 한 시골마을, 안토니아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여섯 살 된 딸 다니엘과 몇 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머니의 사망 후 농장을 물려받은 그녀는 마을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그녀를 반기는 것은 소꿉친구였던 ‘굽은 손’과 젊은 시절 연인 사이였던 바스 뿐, 마을 사람들은 그저 무심하게 그녀들을 맞는다. 그녀들은 마을의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 안토니아의 딸은 그림을 그리며 행복해하고 아이가 키우고 싶어 졌을 때 아이를 낳아 키운다. 여기에 남성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결혼으로 자신을 얽매지도 않는다. 안토니아는 자신의 아들을 키워 달라고 요구한 남자에게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잡일을 거들어줄 남자가 필요할 뿐이다. 기존의 불평등한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부정하는 완전히 개방되고 평등한 공동체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안토니아스 라인이라고 불리는)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늘어나기 시작하지만 그 누구도 가부장적 권력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롭게 소통하며 사랑을 하며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공간에 대한 위협에는 결연히 맞선다.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안토니아의 가족에게 사랑과 시련, 그리고 탄생과 성장, 사망이 이어지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 자손들을 통해 또 다시 이어진다.


즉, <안토니아스 라인>은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 및 질서를 거부하고 바꾸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남성이란 의미 없는 개념이며 그들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만의 진정 자유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부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사회 통념 때문이고, 그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들은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이다.

영화는 위와 같은 과정을 아주 유쾌하게 보여주지만 그들의 공동체와 주위의 여타 가정과의 대비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과 함께 지나치게 동화적이라는 지적이 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영화 자체의 설득력을 약화 시킨다. 안토니아를 이해해주는 남성들과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히 환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지 안토니아의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이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신화이고, 전설이며, 더 나아가 역사로서 이야기 되고 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안토니아스 라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명쾌한 주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생활 속에서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여성을 착취하고 억압해온 구태인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길은 이것을 구성하고 조직해온 체제를 전복함에 있지 않다.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 답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하는 적은, 바꾸어야 하는 편견은 생활 속에 있으며, 역시 동지도 생활 속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가족에게 말을 걸어 봄이 어떨까, 생활속의 투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가족 안에서 길을 잃은 개인을 위해 <바람난 가족>

영화 <바람난 가족>
영화 <바람난 가족>

<바람난 가족>의 가족과 <안토니아스 라인>의 가족은 많이 다르지만 어느 면에서는 닮았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들과 같은 가족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과, 그 가족의 중심에 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것은 여성이 가족이 중심이 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슬픈 반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하는 문제는 이 영화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족상”이다. <바람난 가족>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이 영화의 제목처럼 모두가 “바람이 나거나”, “바람나기를 준비하고”있다. 하지만 사회의 통념처럼 이 바람난 가족이 “콩가루”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중심에 여성인 호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정이 가족의 구성원을 위해 희생하거나 봉사하며 한 없이 이해하는 현모양처이기 때문은 아니다. 호정은 간암 말기의 시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고, 15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나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는 시어머니를 지지하며, 자신의 입양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아들과는 진심으로 대화를 나눈다. 남편인 영작을 제외하면 이 4명은 그 누구도 혈연관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지만 이 영화 안의 다른 어떤 가족 보다 떳떳하고 즐거워 보인다. 그것은 그 안에 가족을 구성하는 어떤 제도적 억압도 없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개인의 욕망에 충실 하는 것이, 그럼 으로서 이루어 가는 개인의 행복이 가족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가족의 화목”을 이루는 시작임을 이 영화는 이야기 하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바람났지만, “남의 인생 참견 말고, 남이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라는, 가족을 구성하는 새로운 윤리로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이 가족은 결국 또 다른 가부장제와 충돌하며 붕괴하기 시작한다.

영화속에는 또 다른 가족의 모습이 있다. 술을 마시면 늘 처남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문제가 생기면 모든 가족 구성원이 찾아가 통사정을 하며,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잘못을 빌기에 바쁘다. 이들을 묶는 절대적 가치는 혈연이며 그로인해 모든 고통은 분담되어야하고, 영화가 보여주는 한 이 가족 안에 개인에 대한,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찾기는 힘들다. 이들은 호정의 남편 영작의 기만에 의해서 호정의 가족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호정이 유지해 오던, 위태롭지만 충실한 “바람난 가족”은 해체되고 만다. 이렇게 영화는 시종일관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조롱을 계속하며 새로운 가족 관계의 대안을 찾아 나가고 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도 기존의 가족을 복원하고자 하는 영작에게는 냉소를, 새로운 구성원을 갖게 되는 호정에게 희망을 보여주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것을 주문한다.

우리의 욕망에 충실하기를 바라며

우리 사회의 성적 구조는 여성 일방에 지나칠 정도로 불평등하게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성적 불평등은 오랜 시간 동안 존재 해왔기 때문에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아 간단하게 해소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시각은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는 여성들의 저항과 요구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쉽게 판단 내리고 심지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주입 시키려 하기도 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전가의 보도인 것처럼 휘두르며 여전히 여성이 가족이라는 굴레 밑으로 종속되기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행복이며, 누구를 위한 소중함인가? <안토니아스 라인>은 우리에게 사회적 성의 불평등을 바로 잡기를 정당하게 요구한다. 영화 속에서 안토니아가 일구어 내는 삶의 모습과 공동체는 결코 그들만의 이상향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기존의 잘못된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진정 자유로운 우리들의 이상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람난 가족>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가족에 대한 고민은, 오늘 날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무한 경쟁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동일한 경제적 능력을 요구하고, 노동 시장의 유연화가 더 이상 성인 남성 노동의 가치를 높게 인정하지 않으며, 이 같은 변화와 함께 호주제의 폐지가 가부장적 가족 제도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현재) 바로 우리가 고민해야할 가족의 문제일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잘못된 통념이나 가치관들을 버리고 조금은 진보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이 땅의 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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