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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낯선 이가 두려워” 인종갈등 ‘조각보’

등록 2006-03-29 20:34


영화 ‘크래쉬’

로스앤젤레스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세트장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숏컷> <매그놀리아> 등 그 도시의 곳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군상들을 등장시키는 영화들에서 배경으로 사용됐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크래쉬> 역시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여러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며 그들의 불안한 내면을 응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끌어가는 11명의 인물들은 그 불안의 수위가 일상의 틀을 허물어버릴 만큼 아슬아슬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에게서 느끼는 불편함 이상의 두려움은 9·11 사태 뒤 미국사회가 지닌 위기의식과 피해망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일 것이다.

지방검사 닉(브랜든 프레이저)의 아내 진(샌드라 블럭)은 젊은 흑인 둘에게 자동차 강도를 당한 뒤 집 열쇠를 교체하러온 히스패닉 수리공과 가정부에게 엄한 히스테리를 부릴 정도로 날카로워져 있다. 부부는 백인이다. 잘나가는 텔레비전 피디인 흑인 카메론(테렌스 하워드)는 운전 중 이유없이 백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의 불심검문에 걸린다. 카메론은 아내 크리스틴(탠디 뉴튼)이 라이언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더 큰 피해를 당할까봐” 저항하지 못하고 아내는 이런 남편을 환멸한다. 라이언의 파트너인 젊은 백인 경찰 핸슨(라이언 필립)은 파트너를 바꾸고 싶어하지만 흑인 상사에게 거부당한다.

한편 아랍계 이민자 파라드는 문짝을 바꿔야 한다는 열쇠수리공의 제안을 무시했다가 도둑이 들자 수리공을 의심해 총을 들고 그의 집에 찾아간다. 능력있는 흑인 형사 그레이엄(돈 치들)은 흑백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수사중인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자는 지방검사 닉의 제안에 고민한다.

올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인위적 사건전개 껄끄러움

<크래쉬>는 다양한 인종들이 융합·동화되는 곳이라는 의미로 미국을 상징하는 단어인 ‘멜팅 폿’을 폐기해야 할 지경이 된 미국사회의 인종갈등을 조각보 이불처럼 펼쳐보여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인종문제라기 보다 폴 헤기스 감독의 말대로 9·11 이후 미국인들이 머릿 속에 자리잡은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기에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보다 개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개입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인종갈등을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문제로 바라본다.

백인 라이언은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다음날 교통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전날 성추행했던 크리스틴을 구할 만큼 직업의식이 투철하다. 반면 편견없는 사람처럼 보이던 핸슨은 무의식적 공포로 인해 무기가 없는 흑인 청년을 죽이게 된다. 흑인 신사 카메론의 합리성과 부드러움은 주류 백인들의 눈치를 보는 그의 비굴한 태도와 일맥상통하며, 엄정한 흑인 형사 그레이엄은 결국 친동생이 살해당하는 걸 막지 못한다. 이처럼 영화는 등장인물의 양화와 음화를 고루 비추며 관객에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은 편견과 편협함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런 질문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대주의로 환원시키는 영화의 시선은 너무 속 편하다. 그 탓에 사건을 발전시키고 봉합시키는 과정도 지극히 인위적이다.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들 안의 편견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인종문제에 대한 여러개의 파일을 만들어놓은 다음 그 안에 인물들을 배치한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아랍인 파라디나 그레이엄의 전형적인 흑인 빈곤층 가족배경을 그리는 방식에는 관습이 끼어들어 도리어 인종차별이나 계급차별적인 냄새를 풍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각본을 썼던 폴 헤기스의 연출 데뷔작이다. 4월6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타이거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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