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신상옥 감독이 남북한에 설립한 영화제작사
조희문 "한국 영화 기업화 선도한 시네마 왕국"
조희문 "한국 영화 기업화 선도한 시네마 왕국"
11일 밤 타계한 고(故) 신상옥 감독은 자신이 설립한 신필름과 함께 한국 영화사의 영욕을 함께 했다.
해방 이후 신필름의 존재는 한국 영화의 제작, 투자, 배급 등을 아우르는 영화 기업화의 모태로 여겨지고 있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사는 신상옥프로덕션, 인수를 통해 규모를 확대한 서울 영화사, 안양영화, 신아영화, 신필림, 신필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영화계에서는 이를 통칭해 '신필름'이라고 부른다.
고 신상옥 감독은 신필름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영화의 '황제'이자 영화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활동해왔다. 신필름은 50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맞았던 60년대와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납북됐던 1978년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기업화의 개념을 도입, 확장했다.
신 감독은 납북돼 북한에서 영화 제작 활동을 할 당시에도 '신필름'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논문 '한국 영화 기업화의 가능과 한계'를 발표했으며 신상옥 감독의 일대기를 준비중인 조희문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는 "신필름은 남한과 북한에서 유일하게 제작에 참여했던 영화제작사로서 한국 영화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방이 되던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신 감독은 이듬해 고려영화협회 소속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52년 영화 '악야(惡夜)'와 함께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50년대 신상옥프로덕션과 서울영화사라는 이름을 통해 감독이자 제작자로 나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 그의 대표작이 신필름을 통해 발표됐다. 당시 신필름은 원효로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 기존 충무로 영화세력과 팽팽히 맞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신필름은 제작과 함께 배급까지 맡은 종합영화사였지만 무엇보다 신진 영화인을 배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조 교수는 "황기성ㆍ김갑의 씨 등 제작자, 임원식 감독을 비롯해 최은희, 신영균, 남궁원, 신성일 씨 등 60~70년대 활동했던 배우 대부분이 신필름을 통해 배출됐다"고 말했다. 신필름이 만든 영화와 배출한 영화인을 통해 신상옥 감독은 영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척박한 경제 환경에 놓여있던 196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거대 영화사가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이를 조 교수는 "거인이 홀쭉한 다리로 서 있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신필름의 자금 사정은 쪼들리게 됐다. 60년대 중분부터 부도 위기를 맞으며 폐ㆍ전업을 통해 근근이 이어갔다. 때로는 위장 폐업도 하게 됐다. 신필름이 여러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사는 신 감독과 함께 신 감독의 형인 신태선 씨, 최은희 씨의 여동생 최경옥 씨가 돌아가며 대표직을 맡으며 유지됐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 되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 정치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가 잠시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나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위기를 맞게 된다. 신필름의 결정적인 폐업 계기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콜걸을 다룬 홍콩 영화 '소녀(召女)'의 예고편이 여고생 단체 관람 영화 상영에 앞서 틀어진 것 때문이다. '청소년 관람가' 영화에서 성인영화 예고편이 등장한 것을 두고 해당 학교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사회적 논란이 빚어졌다. 수입사였던 신필름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똥은 신필름으로 튀어 결국 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1978년 1월 최은희 씨에 이어 7월 신상옥 감독마저 납북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납북 사건은 영화계에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최씨는 납북된 게 맞지만 신 감독은 월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조 교수는 "공식적으로는 납북이라고 확인됐고, 86년 이들 부부가 북한을 탈출한 이후 납북이라고 말해왔지만 당시 정치적ㆍ영화적 환경으로 볼 때 신 감독이 월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열렬한 영화 팬으로 알려진 김일성 주석이 비록 북한 영화는 선전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대중에게 재미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남한에서 위치가 흔들리고 있던 신 감독이 이를 활용했을 수 있다는 것. 어찌됐든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북한에서도 신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었다. 이들 부부는 탈북 후 "4~5년 동안 감시와 핍박을 받아왔다"고 하지만 영화 제작이 활발히 이뤄지고, 영화 기획에 참여했던 것을 보면 단순한 납북으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다. 신 감독은 북한 신필름을 통해 발표된 '탈출기' '소금' '심청전' '불가사리' 등 7편 외에도 다수의 북한 영화에 기획자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소금'은 북한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극적인 액션 장면을 선보였고, '사랑 사랑 내 사랑' 역시 자유로운 멜로 영화 성격을 띠는 등 선전 영화 일색이었던 북한 영화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6년 탈북 후 미국에서 체류한 신상옥 감독은 예전의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미국 영화 제작 시스템을 접한 후 사업가로서 역량을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마유미' '실종'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여전히 한국의 대표 영화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려 노력했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도빌영화제 심사위원장 등 세계 영화계의 주류로 편입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에 참석해 한국 영화계와 끈끈한 유대 관계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거장의 일생도 내리막길을 걷게 만들었다. 영원한 현역 영화 감독으로 머물고 싶어했던 신 감독은 2002년 '겨울이야기'를 만들었으나 개봉하지 못했고, 말년의 꿈이었던 '칭기즈 칸' 역시 제작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조 교수는 "예술가이자 사업가, 흥행사이자 정치적 인물이었던 신상옥 감독은 해방 전 감독이자 배우, 제작자로 활동했던 나운규 감독과 견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하며 "이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신상옥 감독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한국 영화 통사를 짚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kunnom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해방이 되던 1945년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신 감독은 이듬해 고려영화협회 소속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52년 영화 '악야(惡夜)'와 함께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50년대 신상옥프로덕션과 서울영화사라는 이름을 통해 감독이자 제작자로 나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 그의 대표작이 신필름을 통해 발표됐다. 당시 신필름은 원효로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 기존 충무로 영화세력과 팽팽히 맞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신필름은 제작과 함께 배급까지 맡은 종합영화사였지만 무엇보다 신진 영화인을 배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조 교수는 "황기성ㆍ김갑의 씨 등 제작자, 임원식 감독을 비롯해 최은희, 신영균, 남궁원, 신성일 씨 등 60~70년대 활동했던 배우 대부분이 신필름을 통해 배출됐다"고 말했다. 신필름이 만든 영화와 배출한 영화인을 통해 신상옥 감독은 영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척박한 경제 환경에 놓여있던 196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거대 영화사가 살아남기는 쉽지 않았다. 이를 조 교수는 "거인이 홀쭉한 다리로 서 있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수십 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신필름의 자금 사정은 쪼들리게 됐다. 60년대 중분부터 부도 위기를 맞으며 폐ㆍ전업을 통해 근근이 이어갔다. 때로는 위장 폐업도 하게 됐다. 신필름이 여러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사는 신 감독과 함께 신 감독의 형인 신태선 씨, 최은희 씨의 여동생 최경옥 씨가 돌아가며 대표직을 맡으며 유지됐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 되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 정치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종필 전 공화당 총재가 잠시권력 핵심부에서 밀려나고,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위기를 맞게 된다. 신필름의 결정적인 폐업 계기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콜걸을 다룬 홍콩 영화 '소녀(召女)'의 예고편이 여고생 단체 관람 영화 상영에 앞서 틀어진 것 때문이다. '청소년 관람가' 영화에서 성인영화 예고편이 등장한 것을 두고 해당 학교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사회적 논란이 빚어졌다. 수입사였던 신필름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똥은 신필름으로 튀어 결국 법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1978년 1월 최은희 씨에 이어 7월 신상옥 감독마저 납북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납북 사건은 영화계에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최씨는 납북된 게 맞지만 신 감독은 월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조 교수는 "공식적으로는 납북이라고 확인됐고, 86년 이들 부부가 북한을 탈출한 이후 납북이라고 말해왔지만 당시 정치적ㆍ영화적 환경으로 볼 때 신 감독이 월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열렬한 영화 팬으로 알려진 김일성 주석이 비록 북한 영화는 선전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대중에게 재미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남한에서 위치가 흔들리고 있던 신 감독이 이를 활용했을 수 있다는 것. 어찌됐든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북한에서도 신필름이라는 영화사를 만들었다. 이들 부부는 탈북 후 "4~5년 동안 감시와 핍박을 받아왔다"고 하지만 영화 제작이 활발히 이뤄지고, 영화 기획에 참여했던 것을 보면 단순한 납북으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다. 신 감독은 북한 신필름을 통해 발표된 '탈출기' '소금' '심청전' '불가사리' 등 7편 외에도 다수의 북한 영화에 기획자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소금'은 북한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극적인 액션 장면을 선보였고, '사랑 사랑 내 사랑' 역시 자유로운 멜로 영화 성격을 띠는 등 선전 영화 일색이었던 북한 영화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6년 탈북 후 미국에서 체류한 신상옥 감독은 예전의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려 했다. 미국 영화 제작 시스템을 접한 후 사업가로서 역량을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마유미' '실종'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여전히 한국의 대표 영화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하려 노력했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 도빌영화제 심사위원장 등 세계 영화계의 주류로 편입했으며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에 참석해 한국 영화계와 끈끈한 유대 관계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은 거장의 일생도 내리막길을 걷게 만들었다. 영원한 현역 영화 감독으로 머물고 싶어했던 신 감독은 2002년 '겨울이야기'를 만들었으나 개봉하지 못했고, 말년의 꿈이었던 '칭기즈 칸' 역시 제작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조 교수는 "예술가이자 사업가, 흥행사이자 정치적 인물이었던 신상옥 감독은 해방 전 감독이자 배우, 제작자로 활동했던 나운규 감독과 견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평하며 "이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신상옥 감독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한국 영화 통사를 짚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kunnom 김가희 기자 kah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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