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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17 17:49 수정 : 2005.02.17 17:49

광기에 무너진,
그대는 나의 어머니

“독일이여, 창백한 어머니여! 너는 그 얼마나 더럽혀진 상태로 세계 사람들 사이에 말없이 서있는가” 독일의 여성감독 헬마 잔더스-브람스의 80년도 영화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브레히트의 시 <독일>의 전문을 낭독하며 시작된다. 시에서 독일을 은유하는 어머니는 아버지(나치)의 광기에 무력하거나 무지했기 때문에 공모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휘두른 칼에 피흘린 자식의 피를 넓은 치마자락에 받아 내야 하는 희생자이기도 했다.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가해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한 어머니의 수난사를 통해 전후 독일의 비극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여성 수난사로 본 전후 독일의 비극
감독 자신의 이야기 깊고도 큰 울림

나치즘이 발호하던 2차대전 발발 직전 순진하지만 강단있는 처녀 리네는 단지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에 나치당원이 되길 거부했던 한스와 결혼한다. 얼마 뒤 남편은 비당원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징집당한다. 이때만 해도 리네는 휴가나올 남편을 맞이할 때 입을 블라우스에 수를 놓기 위해 철없게도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 상점에 빨간 실을 구하러 가는 새신부였지만 그의 이 순진함 또는 무지함도 전쟁의 날카로운 칼끝 앞에서 무너진다. 요란한 공습 사이렌 한 가운에서 딸 안나를 낳은 그는 억척스럽게 생존의 전쟁을 벌여나간다.

그러나 꼬마 안나의 말대로 “전쟁이 끝나면서 우리 집에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종전 뒤의 또 다른 전쟁, 또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시작된 비극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만 돌아오면 모든 게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리네의 소박한 소망은 산산조각난다. 전쟁 초반 젊은 여자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모두 내 아내같은 여자들이야”라고 울부짖던 한스(실제로 한스가 죽이는 두 여자를 리네역의 에바 마테스가 연기한다)는 집으로 돌아온 뒤 전쟁터에서 그토록 혐오하던 냉혹한 ‘남성’이 되어 출세에만 열을 올리고 집안은 살벌한 군대처럼 변한다. 리네는 충격 때문에 얼굴 반이 마비되버리지만 그를 연민하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딸 뿐이다.

브레히트는 이 영화의 주제 뿐 아니라 형식에도 기여한다.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의 사연을 스크린에 기록하면서도 한 여인의 지독한 수난사에 좀처럼 값싼 동정이나 연민을 드리우지 않는다. 리네는 무너진 자신의 얼굴과 인생에 냉랭하기만 한 남편에게 “내가 원한 건 사랑”이었다고 말한다. 그 절규는 애처럽기보다 공허하게 들린다. 나아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해자와 피해자의 표정을 하나의 얼굴에 새겨야 했던 한 인생의 비극적 딜레마를 읽게 된다. 그럼에도 관객이 냉정함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모든 이야기가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에게서 따귀를 맞고 자라야했던 그 어린 딸이 자라나 기록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망가진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무력한 어머니가 자살을 하겠다고 걸어잠근 화장실 문 앞에서 어린 안나는 어찌할 줄 몰라한다. 한참 뒤에야 문을 연 어머니를 이제 감싸안아야 하는 건 딸의 몫이다. 여성이나 아이같은 ‘대리인’을 통해 파시즘의 비극을 보여 줬던 뉴저먼시네마의 남성감독들과 달리 자신의 깊은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용기와 그러면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이 영화의 엄정함은 특히 여성관객들에게 마음 속 깊은 곳을 흔드는 울림을 전한다. 18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백두대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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