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의 단행본 표지, 전 13권. ⓒ 학산문화사
요즘 유행하는 우리 아이들의 만화는 무엇일까? 요즘 아이들은 스포츠 만화로는 <테니스의 왕자>를, 코믹 만화로는 <괴짜 가족>과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판타지 만화로는 <강철의 연금술사>와 <이누야샤>, 그리고 <나루토>를 선호한다.
이 만화들을 보면, 케이블 TV는 물론이고 공중파 방송에서도 사라져버린 한국 만화의 미래가 보인다. 우리 시대의 초딩들은 '진부한 만화'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과 더불어, 이 만화들은 15세 이상의 성숙한 마니아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재미와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만화들은 20대 이상의 만화 마니아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이 만화들도 일본 만화라는 아쉽지만, 아이들이 어떤 만화를 접하며 어떤 유행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어른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공부 잘 하는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이들과 대화가 통하는 부모가 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본다.
아이들과 대화가 통하려면,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무엇인지 아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그중에서도 <강철의 연금술사>, 앞서 언급한 만화들 중에서 가장 높은 완성도를 가진 만화다.
<강철의 연금술사> '현자의 돌'이라는 해답을 찾아
이 만화는 이미 일본에서도 '살아있는 전설'이 된 만화다. 아라카와 히로무가 그린 이 만화는 일본에서 제49회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했고, 발행부수가 1천만 부가 넘었다고 하니 '살아있는 전설'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겠다. 마이니치 방송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도 단행본 만화 못지않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초기 그리스 시대에 유행해 이슬람 세계와 중세 유럽에도 영향을 미친 '연금술'을 소재로 한 만화다. 알려지다시피 '연금술'이란 철이나 구리같은 값싼 금속을 금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는 기술로서, 주술적인 성격이 강한 자연학의 일종이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모든 것은 물과 흙, 불과 공기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물질으로든 다시 창조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는 중세에 꽃피웠던 문화인 '연금술'을 소재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연금술'을 업그레이드(?)시킨다. 주인공인 에드워드와 알폰스 형제는 어린 시절에 익힌 연금술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활(인체연성)시키려다가 실패하면서 각각 왼쪽 다리와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에드워드는 자신의 오른쪽 팔을 이용해 동생 알폰스의 영혼을 연성시켜 철제 갑옷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자신이 잃은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은 '오토 메일'이라는 기계 갑옷을 장착한다. 그러면서 '현자의 돌'이라는 근원적인 해답을 찾아, 권력은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군부의 개'라고 괄시받는, 군부 휘하의 국가 연금술사 자격증을 불과 12세의 나이로 획득한다.
'군부의 개'라고 괄시받는 이유는 "모든 대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연금술사의 기본적인 사상을 첫걸음부터 어긴 것이기 때문. <강철의 연금술사>는 그렇듯 근원적인 해답을 찾아 모험에 나서는 소년 만화의 이야기 구도를 띄고 있다.
이 만화를 그렇다고 전형적인 만화일 것이라고 오산하는 것은 금물이다. 서양이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고, 시대도 중세로 그려짐에 따라 다른 만화보다 일본색이 옅게 묘사된 이 만화에서는 '현자의 돌'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두 형제의 이야기가 현란하게 펼쳐진다. 연금술 실력에 따라 기상천외한 것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그들의 '연금술'도 그렇지만, 판타지 만화 특유의 액션도 아이들이 충분히 열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폭력적인 것도 아니다.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등가교환의 법칙)"고 주장하는 프롤로그의 첫 대사가 인상적이다. '현자의 돌'을 찾는 형제의 험난한 여정을 단적으로 묘사한 이 대사는 단순히 연금술에 매진하는 형제들을 위한 대사만은 아니다. 인간이 역사를 열면서 얻은 모든 성과에는 피땀어린 눈물과 열정이 배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어른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사다. 이 만화에 이런 깊이가 없었다면 20대 만화 마니아들이 이 만화에 열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금술'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다 <강철의 연금술사>가 그리는 가상의 세계 '에슈빌'은 끔찍한 내란을 겪으며, 군부통치가 지속되고 있는 곳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공산당의 독재와 내전으로 점철된 동유럽을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기 때문에 군부 소속의 국가 연금술사들이 대중으로부터 '군부의 개'로 통하는 설정은 무척 흥미롭다. 작가가 '에슈빌'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연금술'을 다룬 이유도 갖은 오해 속에서 금기시된 연금술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대사로 통하는 에드워드의 대사 목록에는 신과 과학의 괴리, 지나친 욕심이 불러오는 결과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神)과 같은 애매한 개념은 믿지 않는 과학자인 연금술사가 오히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대사는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종교와 과학이라는 갈림길을 여러모로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사이기도 하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앞서 언급한 '등가교환의 원칙'을 매번 강조한다. 애니메이션에서 매번 오프닝마다 그 대사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작가가 뚜렷하게 해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워낙 강렬하고 인상깊은 대사라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대사는 물론이고, 만화 자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사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 만화가 대단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절대진리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연금술이 중시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의 의미를 오히려 해방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하며, 등가교환할 수 있는 있는 세상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라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만화의 힘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할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본만화는 작가 스스로 특별한 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소재 자체에 대해 치밀하게 파고드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마니아들 스스로 만화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경우에는 '연금술'이라는 소재 자체도 우리가 많은 호기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모호한 세계와 다양한 색깔의 캐릭터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진지하게 그려진다. 단순히 겉멋으로만 보이는 진지함은 분명 아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진지함이라면, 독자들은 만화를 보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단순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만화'라는 문화가 단순히 '시간떼우기용'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특히 <강철의 연금술사>가 그렇다. '시간떼우기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치밀한 설정과 다양한 고뇌가 서린 캐릭터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팔과 다리, 그리고 동생의 몸을 잃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길을 걷는 에드워드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생각하게 만드는 만화도 있다. 일본만화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꾸준히 진화하며,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의 한 장면. 오른쪽의 금발 소년이 형인 ‘에드워드‘이며, 왼쪽의 철제 갑옷은 혼이 갑옷으로 연성된 동생 ‘알폰스‘다. ⓒ 마이니치 방송
'연금술'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다 <강철의 연금술사>가 그리는 가상의 세계 '에슈빌'은 끔찍한 내란을 겪으며, 군부통치가 지속되고 있는 곳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공산당의 독재와 내전으로 점철된 동유럽을 묘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기 때문에 군부 소속의 국가 연금술사들이 대중으로부터 '군부의 개'로 통하는 설정은 무척 흥미롭다. 작가가 '에슈빌'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연금술'을 다룬 이유도 갖은 오해 속에서 금기시된 연금술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대사로 통하는 에드워드의 대사 목록에는 신과 과학의 괴리, 지나친 욕심이 불러오는 결과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神)과 같은 애매한 개념은 믿지 않는 과학자인 연금술사가 오히려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대사는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종교와 과학이라는 갈림길을 여러모로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사이기도 하다. <강철의 연금술사>는 앞서 언급한 '등가교환의 원칙'을 매번 강조한다. 애니메이션에서 매번 오프닝마다 그 대사를 반복하는 것에 대해 작가가 뚜렷하게 해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워낙 강렬하고 인상깊은 대사라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대사는 물론이고, 만화 자체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사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 만화가 대단히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절대진리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연금술이 중시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의 의미를 오히려 해방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하며, 등가교환할 수 있는 있는 세상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라는 희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만화의 힘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할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본만화는 작가 스스로 특별한 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소재 자체에 대해 치밀하게 파고드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마니아들 스스로 만화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경우에는 '연금술'이라는 소재 자체도 우리가 많은 호기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모호한 세계와 다양한 색깔의 캐릭터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도록 진지하게 그려진다. 단순히 겉멋으로만 보이는 진지함은 분명 아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진지함이라면, 독자들은 만화를 보면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단순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만화'라는 문화가 단순히 '시간떼우기용'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특히 <강철의 연금술사>가 그렇다. '시간떼우기용'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치밀한 설정과 다양한 고뇌가 서린 캐릭터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팔과 다리, 그리고 동생의 몸을 잃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길을 걷는 에드워드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생각하게 만드는 만화도 있다. 일본만화는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꾸준히 진화하며,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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