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감독 에릭 쿠의 〈내 곁에 있어줘〉는 고요하면서 격렬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대사나 음향 효과가 거의 없고 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자막으로 진행된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나 결핍으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조용하게 따라가던 영화는 놀라운 이음새로 서서히 이야기의 밀도를 높여가다가 마지막 지점에서 실제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한 감정의 폭발을 끌어낸다. 그것을 통해 언뜻 달콤해 보이기만 하는 ‘내 곁에 있어줘’ 라는 말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느끼게 해준다.
병으로 아내를 잃은 노년의 남자는 그가 운영하던 식료품점 구석에 자신을 유폐시킨다. 아내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그에게는 가끔 집에 오는 아들 말고는 음식 맛을 봐줄 사람이 곁에 없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또래 소녀와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사귀던 소녀 재키는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걸 알게 된다. 영원히 곁에 있어 달라던 친구에게 재키는 응답 없는 문자 메시지를 계속 보낸다. 가족에게 구박덩어리인 뚱뚱한 젊은 남자는 자신이 경비로 일하던 건물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여피족 여자에게 반한다. 그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여자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꽃무늬 편지지에 연서를 쓴다.
아무 관계없는 세 사람의 에피소드가 병렬식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테레사 챈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실존인물이면서 직접 출연한 테레사 챈은 십대 초반 시력과 청력을 잃었다. 영화는 화면으로 펼쳐지는 챈의 일상 위에 암흑 속에서 살던 여성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영어를 배우고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사랑에 빠지기도 했던 개인사를 1인칭 시점의 자막으로 서술한다.
관찰자처럼 세 인물을 따라가던 영화는 뒤로 갈수록 테레사 챈의 스토리와 시선으로 수렴된다. 챈의 삶은 운좋은 헬렌 켈러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챈이 견뎌내야 했던 어둠과 침묵의 세계는 그에게 사랑에 대한 믿음과 긍정의 문을 열어줬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수십년 전 그날 죽었던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그는 완성과 실패, 희망과 절망을 넘어선 사랑의 순연한 힘을 믿는다. 이 힘은 희망을 잃은 노년의 남자에게 다시 생의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이 영화는 사랑의 힘을 긍정하지만 변치 않는 사랑을 예찬하는 게 아니다. 소녀와 뚱뚱한 남자는 여전히 고통받고 때로 우연은 사랑과 함께 삶 자체를 잔인하게 짓밟기도 한다. 테레사 챈이, 그리고 영화가 믿는 사랑의 힘은 좌절과 고통까지 끌어안는 삶의 힘이다. 삶의 심연을 더듬어 등불을 켠 챈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내 곁에 있어줘, 사랑하는 이여. 그러면 내게서 미소는 사라지지 않을 거야”라고 타자를 칠 때 가슴을 파고드는 건 사랑을 감싸고 있는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27일 씨지브이 인디영화관에서 개봉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프리비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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