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y Elliot(2000, 영국)
감독: 스티븐 댈드리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와 형의 편견 속에서 발레에 대한 빌리의 꿈은 커져만 간다. 재능이 엿보인다는 지도 선생님의 설득이나 꿈에 대한 간절함을 내 보이는 빌리의 모습이 그들의 편견을 깨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아니, 자식의 꿈을 키워주는 것은 당연한 부모의 도리였던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아버지는 빌리의 꿈을 위해 당신의 신념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광부인 아버지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빌리의 발레학교 입학금 때문에 파업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다른 파업원들에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자식의 꿈을 위해 감수하게 된다.
직장을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노동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늘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노동의 대가를 위한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들의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자식들 때문일 것이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그래서, 그 어떤 부당한 대우도, 차별도, 비굴함의 강요도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술로 분을 이기며, 사랑하지만 만만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아이의 꿈만은 지켜주고 싶어 하는 우리의 아버지들. 과연 그들은 우리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지켜주는 훌륭한 어른들일까. 현실의 부당함을 그대로 놔둔 채, 혼자서만 아이의 미래라는 그 짐을 짊어진 채 괴로움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그것이 진정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길이며, 아버지의 길이어야 하는 것일까.
자식의 꿈과 당신의 신념이라는 양자택일의 순간에 우리의 아버지들은 전자를 선택한다. 아이의 꿈을 위해서 당신의 신념을 잠시 포기함으로써, 잠시, 또는 좀 더 오랜 시간 당신이 힘들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 당신이 뿌려놓은 씨니까, 당신이 거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 뿐이다. 그 이상 무슨 이유가 있을까. 또 다른 이유가 있다한들 종족보존이라는 원초적 이유 앞에서 부차적인 것일 뿐이리라. 너무나 당연한 질문일 뿐일까. 아버지는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 아버지를 본받은 아이는 후에 아버지가 되어 또 다시 자기 아이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할 것이다. 그렇게 지켜진 꿈은 진정 아버지와 아이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일까. 아니, 자식의 꿈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고통은 이미 행복한 것이어서, 그걸로 된 것일까.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고통은 당연한 것일 뿐이라면, 그 역시 행복이라면 더 이상의 의문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 역시 아버지의 삶일 뿐이라고 한다면, 혼자 짊어지고 가시겠다고 한다면 말이다.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희생 혹은 의무 또한 행복이라면 그래서 행복하니까 남의 행복에 끼어들지 말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당신의 신념을 포기함으로써 겪게 될 생활고를 감수하면서 누리게 될 그 행복이 자식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행복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당신의 신념을 포기한 대가로 자식의 삶의 행복을 통해 그 이상의 행복을 바라겠다면, 우리의 아버지들이 당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특히,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익을 위한 싸움이 아닌, 다수 구성원들의 삶의 조건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차원의 싸움이라면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만일, 그 아이가 올바르게 자랐다면, 어릴 적 자신의 꿈을 키워주지 못한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는 사회구성원 다수를 위한 아버지의 싸움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며, 아버지의 싸움으로 인해, 내 자식의 꿈만이 아니라, 더 많은 아이들이 공정하게 자신의 꿈을 키워나갈 수는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빌리의 아버지가 파업에 적극 동참해서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고, 그래서 아버지의 삶과 다른 파업원들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고 그러면 빌리의 꿈만 아니라, 빌리 친구들의 꿈까지도 키워낼 수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그것이야말로, 빌리와 아버지와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닌가라는, 당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진정으로 빌리의 꿈을 지키는 것은 아닌가라고 감히 우리의 아버지들께 여쭈어보고
싶다. 늘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아직 난 아버지가 아니다. 당연히 아이도 없다. 그래서, 애비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냐고 하신다면 할 말 없다. 만일 내가 빌리의 아버지였다 해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며, 어떤 결정이었든 괴로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 속이라서 그렇지 현실에서는 양자택일의 순간보다는 다양한 선택의 길이 있을 수 있다고, 또는 삶이란 것이 원래 어찌할 수 없는 비애투성이 아니냐고. 그러니,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애써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좀 편하게 살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둥글둥글하게 한 세상 살다가자고. 뭐, 그럴수도 있다. 다만 내가 빌리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에서 궁금했던 것은, 아버지의 <고통을 감수한 희생>이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간이란 본디 이기적인 동물 아니던가. 가족이라서? 핏줄이라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핏줄만이 아니라면, 과연 인간의 이기심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계산적 관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 제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가족이기주의에 머물 수도 있고, 그 역시 그저 또 다른 종류의 계산적관계일뿐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부모자식 간에는 생겨났다가,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사라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는 그 무엇. 계산적 관계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 그것은 뭘까. 사랑의 힘일까. 그렇다면, 그 힘으로 계산적 관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내 가족만 아니라, 다른 가족에게도 그 사랑의 힘은 발휘될 수 없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우리의 사랑, 너무 지쳐버렸나.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이 사랑하고싶지만, 미워하도록 만드는 현실의 조건들을, 계산적 관계들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일까. 무조건 사랑하고볼까. 아니면, 그냥 인간본성으로서의 이기심은 본성이니 어쩔수 없는 것이고, 핏줄에 의한 것은 예외적인 것이고, 오히려 철저한 계산적관계야말로 서로를 위해, 복잡한 힘관계로 얽힌 현실을 살아가기에 깔끔하고 편하니까, 빨리 습득해서 적절하게 이용해 먹는 게 현명한 삶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살아갈까. 그래야할까.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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