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 너머 인연으로 얽힌
여섯명의 사랑 미움 연민
별난 관계가 특별한 관계로
여섯명의 사랑 미움 연민
별난 관계가 특별한 관계로
가족의 탄생
가족이라서 기댈 수 있는 것일까. 기댈 수 있어서 가족일까. 혈연공동체로서 가족의 의미가 강력하게 발휘되는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완고한 울타리 안에 놓여 있다. 가족을 다룬 많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가 ‘한 핏줄이기 때문에’ 의지하고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은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의 해체를 말하기도 한다. <가족의 탄생>(18일 개봉)은 혈연의 울타리를 거두되, 그 자리에 그냥 놓여 있는 가족을 이야기한다. 싸우고 원망하다 슬쩍 곁에 와서 말을 걸거나 훌쩍거리는 이들은 각성된 대안가족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미워도 다시 한번’ 상대방을 돌아보게 만들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건 사랑과 미움이 오랫동안 곰삭아서 피어난 연민의 끈이다.
별종 가족이 별스럽지 않게 사는 이야기를 영화는 3부작 형식으로 나눠서 보여준다. 혼자 사는 미라(문소리)의 집에 5년동안 집나갔던 남동생 형철(엄태웅)이 돌아온다. 반가워하는 미라에게 아내라고 소개하는 무신(고두심)은 엄마뻘되는 중년의 여인. 어색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면서 조금씩 미라와 무신이 눈빛을 나누게 될 무렵 무신의 전남편의 전처의 아이가 무신을 “엄마”라고 부르며 이 집에 들어온다. 사랑에 목숨걸어 유부남의 아이까지 낳고 살아가는 엄마가 지긋지긋한 선경(공효진)은 남자친구와도 깨지고 이래저래 심난한 한국을 떠나기 위해 해외취업을 나가기로 맘먹는다. 막상 떠날 때가 가까워오자 선경은 아픈 엄마(김혜옥)가 운영하는 후줄그레한 가게 주변을 얼쩡거리며 엄마와 엄마의 남자, 그리고 아이에게 꼬장을 부린다. 세번째 에피소드는 평범한 20대 커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신이 독점해야 할 관심과 애정을 여럿에게 나눠주는 채연(정유미)이 “헤퍼 보”여 못마땅한 형석(봉태규)은 헤어지기로 맘먹는다. 결핍감과 불안함에 징징거리는 경석을 키운 건 이복누나 선경. 기차 안에서 다투고 이별을 고하면서 얼떨결에 채연의 집까지 가게 된 경석에게 “헤어지는 게 뭐라고, 밥이나 먹고 가”라며 엉덩이를 두드리는 건 채연의 엄마들, 머리 희끗한 미라와 무신이다.
<가족의 탄생>에는 결혼과 출산 등 호적에 가족의 탄생이 등재되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콩가루 집안’들을 엮는 공통의 모티브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지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라는 말이다. 말을 받는 상대방은 연인일 수도, 친구일 수도, 부모이거나 형제일 수도 있다. 알고 보면 이 말은 ‘내 곁에 있어줘’와 같은 뜻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특별한 인연을 만들며 특별한 존재로 다가간다. 그렇게 인연이 쌓여 미우나 고우나 기댈 수 있을 때 그게 가족이 아니겠는가라고 영화는 말한다.
사건을 요약하는 대신 손에 든 카메라로 등장인물의 감정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며 조용히 곁을 만드는 <가족의 탄생>은 착한 영화다. 그렇다고 순진하거나 위선적으로 사람 사이의 골을 봉합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상처를 그대로 응시하고 그것을 시간 안으로 삭히면서 열정에서 미움으로 미움에서 연민으로 전환하는 깊고 오랜 인연의 조각보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유별난 가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튀는 캐릭터에 의존하거나 정색한 반문을 꺼내지 않으면서 뚜벅뚜벅 가족의 본질, 관계의 본질에 다가는 어법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침착함과 진중함을 지니고 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블루스톰 제공.
“영화 본 뒤 술이나 한잔 하시죠”
6년만의 작품 ‘김태용 감독’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잖아요. 연애를 돕는 영화, 술을 돕는 영화. 〈가족의 탄생〉은 일종의 연애담인데 연애를 돕기보다는 영화 보고 술 한잔 하면서 얘깃거리를 만들어주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가족의 탄생〉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만들었던 김태용(37)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극영화 연출작이다. 〈여고괴담…〉이 그해 최고의 영화로 자주 언급되며 주목받았던 것을 떠올리면 두번째 영화를 꽤나 오래 기다려야 했던 셈이다.
“첫 영화 마치고 유학 다녀온 뒤 새 작품에 대한 조급증과 예술적 성취, 대중적 소통 이런 것에 대한 고민이 계속 충돌했어요. 3, 4년 지나니까 오히려 이런저런 부담이 적어지면서 후딱 들어갈 수 있었죠.”
〈가족의 탄생〉은 친구가 라디오에서 들은 에피소드에서 싹이 텄다. 아내와 함께 살던 여동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을 입양한 다음날 죽은 남자의 이야기. 두 여자와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궁금증. “20년 뒤쯤 딸이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소개하는 그림을 그려봤어요. 그럼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나, 무엇에 끌리고 상처받을까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 거죠.”
결국 〈가족의 탄생〉은 부모와 자식, 형제, 애인, 시누이, 올케가 만나고 좋아하고 상처주고 그 상처를 보듬으며 인연을 맺게 되는 ‘총체적 연애담’이며 ‘관계’와 ‘시간’이 엮어가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완성됐다는 게 감독의 말이다.
시나리오를 다 쓰고 보니까 꼭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여 “이거 무슨 ‘가족의 탄생’ 같다”고 공동작가 성기영씨와 농담처럼 말한 게 진짜 제목이 돼버렸다고.
“혈연과 그로 인한 가족애를 강조하는 영화나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영화를 둘 다 좋아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전자가 일종의 강요 같다면 후자의 냉철한 이성이 위로를 주지는 못하잖아요. 누구나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에서 〈가족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착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삐끗하게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 만족스러운 행복감을 주지는 않는 게 좀 다른 색깔인 거 같아요.”
혈연으로 묶인 가족제도에 대한 저항이나 대안가족의 느낌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이 의도로 보이지 않고 정서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연출에 역점을 뒀다.
〈가족의 탄생〉을 만들면서 막연하게 이 영화의 풍경이 “가족의 아주 초기 형태이거나 후기 형태가 아닐까” 생각했다는 그는 “내 밥그릇, 니 밥그릇 나누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관계맺기에 좀 더 유연해졌으면 좋겠다”는 연출의도를 인터뷰 마지막에 가서야 슬쩍 덧붙였다.
글 김은형 기자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영화 본 뒤 술이나 한잔 하시죠”
6년만의 작품 ‘김태용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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