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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다빈치코드, 팩션(faction)인 것을 뭘!

등록 2006-05-19 15:20

영화 <다빈치 코드>
영화 <다빈치 코드>
영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개봉 전 시사회로부터 개봉작을 서둘러 따라다니는 매니아는 아니기에 여지껏 한 번도 개봉작을 그 당일에 관람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만큼은 그런 나의 관행을 깨게 해 주었다. 개봉 전부터 개봉일을 기다려온 나는 오늘 드디어 개봉일에 맞추어 시네마를 찾았다. 원래 계획은 맨 처음 작품을 보는 것이었지만 아침 일찍부터 서두를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두 번째 상영작을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가장 처음 보고자 한 이유가 있었다. 재작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가 한국에 번역되어 나왔을 때, 그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질문을 받았다. 물론 대부분의 질문들은 그리스도교의 진실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해야 할 질문은 다빈치 코드의 진실에 대한 문제여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치밀한 역사적 탐구와 추리 전개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일단 댄 브라운의 역사적 설정 위에 그리스도교 2천년의 역사를 되묻고 싶었던 모양이다. 역사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가지고 <다빈치코드>의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던 나로서는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면 또 한 번 그 과정을 겪어야 할 것 같아서 아예 이번에는 영화가 나오자마자 영화를 보고 미리 대답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서둘러 시네마를 찾았다.

매표소 앞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많이 와서 표를 구입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에 종종 그 앞을 지나쳐본 경험이 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침일찍부터 영화를 보기 위해 서두르는 광경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의외였던 것은 절반 이상의 관객들이 50대 이상의 중년 부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 사회의 대표 아줌마격인 그 세대의 주부들이 이처럼 문화의 한 장르로서 영화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극장에 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아마도 다빈치코드의 진실에 대한 열망이 특별한 사람들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만일에 나에게 질문을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다빈치코드의 역사적 진실 여부를 물을까? 아니면 그리스도교 역사의 진실에 대해서 물을까?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영화는 작품의 인기 때문인지 본 작품에 앞서 한두 편씩 보여주는 예고편도 없이 곧바로 상영되기 시작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자크 소니에르의 피살, 하버드 대학의 기호학자인 로버트 랭던의 파리 강의와 사인회...갑자기 경찰이 와서 랭던교수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불려가고, 그곳에서 소니에르의 손녀 소피 느뷔를 만나 자신이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거대한 비밀의 한 복판으로 서서히 이끌려가게 되는 장면 등....영화의 흐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관객의 정신적 흩트러짐을 허락하지 않는 채 마지막 결말까지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선호하는 반전까지 빠트리지 않고 마지막 장면 속에 삽입하였다. 소설을 통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반전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해 줄만큼 영화는 소설 못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적어도 내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선 영화적인 면을 말한다면, 원작에 대한 충실한 해석과 그에 따른 탄탄한 내러티브는 역시 완벽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내러티브는 이미 원작에 있던 것인만큼 영화의 공로는 아니었다. 영화의 공로는 그 충실한 원작의 네러티브 위에 탁월한 영화적 미장센을 첨가한 것이리라. 론 하워드 감독의 탁월한 작품성은 그의 <뷰티플 마인드>를 능가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상 최초로 블록버스터인 이 작품을 칸느에 가지고 가 61년 칸느의 역사를 갈아 쓴 사람이 아닌가?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하며, 영화에 나타나는 유럽 최고의 명소들 역시 압권이다. 최초로 영화 카메라 앞에 루브르 박물관 내부가 노출되는 역사가 새로 창출되었다니 이 몇 가지 사실만 놓고라도 <다빈치코드>와 견줄만한 영화가 또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영화적으로 탁월한 것만으로 이 영화가 다 평가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작품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평가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으로서의 메시지,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의 느낌과 해석, 이 모두가 어울려 진정한 평가의 틀을 이루게 된다. 작품으로서 영화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정말 후한 평점을 주었으니 이제 내용과 관객의 해석 측면까지 평가해 보도록 하자.

<다빈치코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작 소설을 읽어야 하고, 원작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식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평론가들이 종종 말해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 점에서 볼 때 나는 <다빈치코드>의 내용에 대해서 평가할 자격이 어느 정도는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내 전공이 그리스도교 역사(교회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가진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매우 익숙하다는 것이다. 우선 영화에 등장하는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의 모습, 영국의 캠브릿지와 성당, 노틀담 사원 등 모든 건물들하며 유럽의 풍경들은 내게 매우 낯익은 모습들이다. 배낭을 메고 몇 차례 유럽을 여행할 때 이 모든 곳들을 잘 둘러본 덕분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눈여겨 보던 장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서 볼 때도 거의 그 위치하며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떠 올랐다. 그곳에 갔다 온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장소들보다도 내게 더 익숙한 것은 바로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서기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하에서의 그리스도교 공인의 역사 하며, 영화의 핵심 플롯으로 등장하는 시온수도회, 탬플기사단의 역사들, 중세 십자군 전쟁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할, 그 후에 등장하는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대한 것들까지 늘 익숙하게 접하는 역사적 용어들과 자료들이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느낌은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도 늘 그런 생각과 말을 했었다. “댄 브라운은 참 부지런한 학자였다고...” 역사의 파편들을 참으로 열심히 좇은 사람이었다. 물론 그도 자신만의 발품으로 그 모든 내용들을 섭력하지는 않았다. 그가 마이클 배전트, 리처드 리, 루이스 퍼듀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표절 시비를 받은 일에서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사실 유럽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중심 내용을 빗겨가는 유사 교회 문서들은 굉장히 많이 있다. 그 내용들을 나름대로 분석한 후 작가의 상상력만 덧붙이면 루이스 퍼듀의 <신의 딸>이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와 같은 팩션을 만들어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2천년 역사 속에 축적된 역사적 자료들은 너무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팩션을 구성하는 일은 작가적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이 <다빈치코드>의 실제 내용이다. 그것은 성배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역사 기록들, 여성 메시아인 “소피아”에 대한 전승들, 그리고 중세 다빈치와 같은 천재들의 애너그램, 중세 교황청의 음모에 대한 기록들, 여기에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 단체들의 비서들....소위 이런 역사적 비서들에 들어있는 역사적 기록들에 픽션(fiction)을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서 팩션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내용의 진실 여부를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다빈치코드>는 소설이든 영화든 한 문화적 작품으로서 재미있게 보고 작가의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면 된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이해하고 영화를 본 나로서는 <다빈치코드>는 하나의 역사의 애너그램이 아닌가 싶다. 수많은 역사의 기록들 중에서 소설을 구성할 수 있는 내용들만 마치 알파벳 하나씩 찾아내어 결국엔 어떤 의미를 가진 문장을 구성해내는 암호해독 작업 같은 거 말이다. 댄 브라운은 그 작업을 한 것뿐이다. 그 애너그램들로서의 역사적 파편들을 다시 원래 그 자리에 다 갔다놓으면 다시 특별한 관련이 없는 내용들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역사를 코드로 한 애너그램인 것이다.

이제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의 느낌과 해석을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이나 영화를 두고 왜 그리스도교계는 발끈하는가? 한기총에서는 이 영화 개봉 전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으나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고, 개봉이 되자 전임 대표회장의 1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법적으로 무효화되자 이제는 1인 시위를 통해 영화안보기 운동을 독려하는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다빈치코드>에 대해 부정적인가? 그리스도교 역사를 학문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다빈치코드>는 팩션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역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빈치코드>에 대해서 굳이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재구성된 팩션으로 역사인양 해서는 안 된다고 정중하게 경고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팩션이고 허구로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염려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소설과 영화는 그 문화적 장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뿐이다. 그건 명확하게 사실을 다루는 역사적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진실 문제를 운운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회가 <다빈치코드> 앞에 전전긍긍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를 보면서 난 새로운 느낌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내러티브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그 플롯들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정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 것 같다. 2천년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항상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해 왔다. 그 것은 다시 말해 인류 사회에 있어서 선의 대리자가 되어 왔다는 것을 말한다. 중세 1천년의 역사가 그랬고, 그 후 프로테스탄트의 역사가 그랬다. 그리스도교는 항상 선의 대리자요, 신의 대리자였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늘 선의 역사로만 보지 않는다. 볼테르가 관용론에서 지적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싸움의 역사이다. 사실 역사의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마녀사냥, 이단재판 등을 서슴지 않아 왔다. 물론 그런 역사들이 다 계몽주의 이전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계몽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는 종교의 이름으로 성전이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이 WASP(백인-앵글로-섹슨-개신교)의 정체성으로 세계 경찰을 자처하고 이슬람과의 성전을 계속 진행하는 것도 이런 역사의 연장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역사 속에서 많은 전쟁들을 치루면서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피를 흘려왔다. <다빈치코드>는 사실 그것을 건드리고 있다. 그건 그리스도교 역사의 아킬레스건이다. 아테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단 한 곳 그 아킬레스건에 약점이 있어서 쓰러져 죽었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지금 <다빈치코드> 앞에서 예민해하는 그리스도교의 모습의 신화적 형식을 보여준다.

마치 댄 브라운이 파리스가 된 형국이다. 그가 그리스도교의 아킬레스건을 향해 활을 쏜 것이다. 얄밉게도 론 하워드는 그런 브라운의 전략을 아주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래서 영화 곳곳에서, 특별히 사일러스(폴 베타니 분)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아킬레스건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회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그리스도인 역사가로서 나는 이런 그리스도교회의 모습이 못마땅하다. 왜 역사의 일부가 그리스도교의 전부인 것처럼 전전긍긍해 하는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그늘도 있지만 빛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을 찾아서 그걸 계속 이어가고 전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빛을 계승한 자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 중 일부에 빛을 계승하지 못한 어두움의 역사가 있다고 그걸 숨기려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더구나 그 어둠의 역사는 이미 다 알려진 것임에 더 무엇이 새로울 게 있겠는가?

그리스도교는 역사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전달된 빛의 사명이 있기에 당당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수많은 기회와 방법들을 통해서 지난 과오들을 고백하고 참회의 길을 걸어왔다. 많은 피의 역사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들이었고, 그런 비본질적 과오들마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끝없이 용서를 받아 왔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역사적 전철이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의 길을 가고자 고백해 왔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회의 모습이다. 이 용서받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댄 브라운의 화살 쯤 십자가로 여기고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난 책을 읽을 때 하지 못했던 기도를 하게 되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죄의 요소들을 제거해 달라고! 앞으로 더욱 더 이 세상에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그리고 한국의 그리스도교회, 나아가 전 세계 그리스도교회가 인류 사회에 진정한 희망의 종교가 되도록 이끌어 달라고! 그러고보니 <다빈치코드> 안보기 1인 시위보다는 <다빈치코드> 보고 회개하기 운동을 벌이는 편이 훨씬 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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