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베르’의 알모도바르
‘보리밭을 휘젓는 바람’의 로치
‘보리밭을 휘젓는 바람’의 로치
제59회 칸 국제영화제는 노장 감독과 젊은 감독이 절반쯤의 비율로 일합을 겨루고 있다. 경쟁작 22편 가운데 3분의 1인 7편이 공개된 21일(현지 시각)까지의 분위기는 역시 노장의 우세였다. <스크린>의 칸영화제 데일리 등이 매기는 평점을 보면, 국내에도 팬이 많은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57)와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70)가 중국의 로우예와 미국의 리차드 링클레이터 등을 제치고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다.
“내 어린시절 여자들이 얘기 원천”
“이 영화는 내 근본으로의 회귀다. 내 뿌리, 내 어린 시절과의 화해다. 라만차에서 태어난 나는 여자들에 둘러싸여, 그들에 의해 자랐다. 남자들은 밖에 나가 있어서 내가 볼 수 없었다. <볼베르>는 내가 자랐던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여자들의 얘기를 듣는 영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칸에 들고 온 <볼베르>는 할머니에서 손녀까지, 3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다. 라만차 출신의 두 자매가 마드리드에 산다. 언니는 남편이 떠났고, 동생은 전 남편의 딸과 함께 재혼한 남자와 산다. 동생의 딸이 자신을 성추행하려던 새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은 남편의 주검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가 유령처럼 나타나선 자매들을 돕는다. 공포, 스릴러에 더해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마술적 리얼리즘까지, 한데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요소들이 혼재해 있지만, 알모도바르는 전작들처럼 자기만의 분위기로 이것들을 버무려낸다. 그 분위기는 따듯하고 정감어린 멜로드라마 같다. 몇차례 반전을 거치면서 영화는 남자 없이 사는 여자들의 삶이 대를 이어 순환되는 구도를 완성해낸다.
남자에 의지 않는 3대 여자들 장르 혼재된 ‘따뜻한 멜로’
1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영화의 주연배우인 페네로페 크루즈는 알모도바르를 두고 “여자의 모든 면을 꿰뚫어 보는 놀라운 눈의 소유자이며, 그 눈으로 본 것을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줄 줄 아는 용기를 지녔다”면서 “이 영화의 정수는 여성적 에너지”라고 말했다. 알모도바르도 “어릴 때 어머니와 강둑을 거닐면서 마을 여자들의 노래를 들었고, 거기서 극예술의 영감을 얻었다”면서 “그 여자들은 내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원천이 됐다”고 말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공존이라는 모티브가 이 영화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알모도바르의 생각은 남다른 듯했다. “이 영화는 죽음과 죽은 자를 대하는 내 고향의 제의에 대한 헌사다. 내 마을에선 죽은 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걸 믿지 않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을 영화 속에 등장시키려고 노력해왔다. 그 다른 세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그의 작품의 방향을 짚어볼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독립투쟁 민중은 언제든 좋은 소재”
2000년대 들어 동시대 하층 계급의 모습을 자주 담아온 켄 로치가 칸에 들고 온 <보리밭을 휘젓는 바람>은 1920~22년의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다룬다. 그 점에서 켄 로치의 근작들보다 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다뤘던 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을 떠올리게 한다.
아일랜드인 형제가 영국 식민군에 맞서 무장 투쟁에 나선다. 저항군을 처참하게 고문하고 사살하는 영국군의 횡포에 맞선 이들의 저항 또한 폭력을 동반하며, 그 폭력엔 동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두 형제 모두 비인간적인 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면서 괴로워하지만, 그중에서도 투쟁의 원칙과 명분을 끊임없이 따져묻는 동생은 좌파의 길을 걷는다. 아일랜드 임시정부가 영국과 타협적인 평화협정을 맺은 직후 형은 협정을 따르는 우파가 되는 반면, 동생은 계속 투쟁의 길로 나선다.
“제국주의 세력은 항상 위기에 몰릴 때 타개책으로 식민지 저항세력을 둘로 나누고, 그중에서 현재의 경제적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쪽을 지원한다.” 지난 18일 공식 기자회견을 가진 켄 로치의 선명한 역사 의식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지금 미국과 영국이 벌이는 이라크전 역시 마찬가지 구도임을 지적하면서 “어떻게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불법적 전쟁”이라고 못을 박았다.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는 언제든지 좋은 소재가 된다. 언제나 지구상에는 침략군과 그에 저항하는 민중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장투쟁 나선 아일랜드 형제 ‘역사의식’ 냉정하게 담아내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좌파 감독으로 불리는 켄 로치이지만, 전작들처럼 이 영화도 도식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저항에 수반되는 폭력을 냉정하게 그린다. 그걸 정당화하지도 않고, 탄압하는 쪽이든 저항하는 쪽이든 다 똑같이 폭력적이라는 식으로 격하하지도 않는다. “동생은 폭력을 경험하면서 사람이 바뀐 뒤 그 자세를 끝까지 지키지만 형은 끝까지 두려워한다… 슬프지만 정의를 지키려면 이런 격렬한 변화의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이 영화를 포함해 켄 로치의 최근작 7편의 시나리오를 쓴 폴 래버티가 회견에 동참해 거들었다. “영화에선 폭력을 낭만적으로 그리기가 아주 쉽다. 우린 이걸 피하기 위해 무척 신경 썼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임범 기자 isman@hani.co.kr
“독립투쟁 민중은 언제든 좋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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