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트리아출신의 한스 바인가르트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에쥬케이터, Educators(원제: Die Fetten Jahre sind vorbei), 독일, 오스트리아, 2004>는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는 얀, 피터, 율. 세 젊은이의 삶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는 영화이다. 젊은 감독은 세 젊은이들의 진지하면서도 거침없는 행동들을 경쾌하면서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15년 지기 친구인 얀과 피터. 그들 고민의 중심에는 자유로운 삶이 있고,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중심에는 자본주의독재정권이 있고, 그 정권의 중심에는 대자본가들이 있다. 그래서, 대자본가들이 집을 비운 사이 침입한다. 그리고는, 물건은 훔치지 않고, 가구의 배치를 바꾸어 놓고,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다. <너의 풍족한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Educator>
결국, 감독이 말하는 교육자는 얀과 피터이며, 그 대상은 대자본가들이다. 그리고, 교육의 목표는 대자본가들이 그들의 행동을 보고 겁에 질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 찾는 순간에 그들이 남긴 문구가 그들 귓전에 울릴 것이며, 그래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순진하고 위험해 보이는 Educator 얀과 피터의 행동이 무모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신념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부단히 현실의 부정을 알아내고, 연대할 동료들을 찾는다. 난장판 속에서도 늘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보기위해 노력하는 그들. 그것은 누구나 꿈꾸는 자유로운 삶을 위한 그들만의 행동방식인 것이다.
신문에까지 알려지게 된 교육자들은 피터의 여자 친구 율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율은 벤츠승용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8년간 그 빚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는 부엌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요리사와 함께 해고되는 일까지 생긴다. 피터가 휴가를 떠난 사이 율은 얀을 졸라 벤츠승용차의 주인 하르덴베르크의 집에 침입하게 된다. 그런데, 율은 휴대폰을 놔두고 오고, 다음날 폰을 찾으러갔다가 하르덴베르크와 마주치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를 산장으로 납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시작된 네 사람의 동거. 얼떨결에 납치된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젊은이들을 하르덴베르크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부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고 말하지만, 얀은 가난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난을 방치하며, 그들의 피를 빨아야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결국, 그가 소유한 것은 모두 훔친 것이라고 말한다. 개선이 필요하지만, 현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하르덴베르크. 이유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다른 이들보다 높은데 서려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것이다. 얀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 tv를 볼 때, 그들이 행복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대기업들이 그 행복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으며, 그리고, 붕괴된 정신, 무감각한 폭력으로인해 모두가 불행해질 것라고한다. 어쨌든, 내가 휘둘렀지만, 이 체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고 강변하는 하르덴베르크.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역시 30여 년 전 젊은 시절. 68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자유당은 안 된다던 아버지의 말을 부정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 자신의 변화를 모든 일이 천천히 일어나서 알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느날 낡은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갖고 싶게 되며, 결혼해서 가족을 부양하게 되고, 집을 사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데, 그게 다 돈이라고. 끊임없이 빚이 생기고, 그걸 갚기 위해 출세해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보수당에 한 표 찍게 된다고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동거가 끝이 나고, 율에게 빚 포기각서를 써준 하르덴베르크는 조금 생각의 변화가 있은 듯 하지만, 결국, 경찰에 그들을 신고한다. 하지만, 이미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어떤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교육자들은 지중해의 섬에 있는 유럽의 모든 TV를 관리해주는 송신소를 파괴하기 위해 떠나고 없다. 하르덴베르크의 말처럼, 좀 더 행복해지려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얀 역시 인간이며, 그에게도 그러한 본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얀 역시 서서히 변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르덴베르크가 30여 년 전 그러했듯이, 얀의 저항정신 역시 인간의 본성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심장은 혁명을 꿈꾼다는 얀의 말처럼. 하르덴베르크는 인간본성을 들먹이며, 자신의 변화를 변호하지만, 어디, 혁명을 꿈꾸었던 이가 그 뿐인가? 그리고, 모두가 그 안락한 인간본성에 패배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결국, 하르덴베르크는 인간본성을 내세워 자본주의독재정권에 대한 적응을 부추기는 대자본가들에게 패배한 과거의 혁명가, 현재의 대자본가일 뿐인 것이다. 혁명 역시 이제 대자본가들의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역시 하르덴베르크와 같은 이들의 광고전략 아니겠는가? 이미 너무 많이 가져 현실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힘든 이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얀과 같은 젊은이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본성을 들먹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의 그럴듯한 광고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위해 끊임 없이 현실의 부정을 알아내어 알리고, 연대할 동료를 찾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얀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고의 이념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거지. 개개인의 저항정신에도 마찬가지야. 뭔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네 안에 살아남아 널 더 강하게 만들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문에까지 알려지게 된 교육자들은 피터의 여자 친구 율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율은 벤츠승용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8년간 그 빚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는 부엌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요리사와 함께 해고되는 일까지 생긴다. 피터가 휴가를 떠난 사이 율은 얀을 졸라 벤츠승용차의 주인 하르덴베르크의 집에 침입하게 된다. 그런데, 율은 휴대폰을 놔두고 오고, 다음날 폰을 찾으러갔다가 하르덴베르크와 마주치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를 산장으로 납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시작된 네 사람의 동거. 얼떨결에 납치된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젊은이들을 하르덴베르크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부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고 말하지만, 얀은 가난한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가난을 방치하며, 그들의 피를 빨아야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때문에, 결국, 그가 소유한 것은 모두 훔친 것이라고 말한다. 개선이 필요하지만, 현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하르덴베르크. 이유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다른 이들보다 높은데 서려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것이다. 얀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살 때, tv를 볼 때, 그들이 행복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대기업들이 그 행복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으며, 그리고, 붕괴된 정신, 무감각한 폭력으로인해 모두가 불행해질 것라고한다. 어쨌든, 내가 휘둘렀지만, 이 체제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고 강변하는 하르덴베르크.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역시 30여 년 전 젊은 시절. 68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자유당은 안 된다던 아버지의 말을 부정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 자신의 변화를 모든 일이 천천히 일어나서 알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느날 낡은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갖고 싶게 되며, 결혼해서 가족을 부양하게 되고, 집을 사고,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데, 그게 다 돈이라고. 끊임없이 빚이 생기고, 그걸 갚기 위해 출세해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보수당에 한 표 찍게 된다고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동거가 끝이 나고, 율에게 빚 포기각서를 써준 하르덴베르크는 조금 생각의 변화가 있은 듯 하지만, 결국, 경찰에 그들을 신고한다. 하지만, 이미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어떤 사람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교육자들은 지중해의 섬에 있는 유럽의 모든 TV를 관리해주는 송신소를 파괴하기 위해 떠나고 없다. 하르덴베르크의 말처럼, 좀 더 행복해지려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얀 역시 인간이며, 그에게도 그러한 본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얀 역시 서서히 변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르덴베르크가 30여 년 전 그러했듯이, 얀의 저항정신 역시 인간의 본성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심장은 혁명을 꿈꾼다는 얀의 말처럼. 하르덴베르크는 인간본성을 들먹이며, 자신의 변화를 변호하지만, 어디, 혁명을 꿈꾸었던 이가 그 뿐인가? 그리고, 모두가 그 안락한 인간본성에 패배했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결국, 하르덴베르크는 인간본성을 내세워 자본주의독재정권에 대한 적응을 부추기는 대자본가들에게 패배한 과거의 혁명가, 현재의 대자본가일 뿐인 것이다. 혁명 역시 이제 대자본가들의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역시 하르덴베르크와 같은 이들의 광고전략 아니겠는가? 이미 너무 많이 가져 현실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힘든 이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얀과 같은 젊은이들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본성을 들먹이며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의 그럴듯한 광고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위해 끊임 없이 현실의 부정을 알아내어 알리고, 연대할 동료를 찾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얀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고의 이념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거지. 개개인의 저항정신에도 마찬가지야. 뭔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네 안에 살아남아 널 더 강하게 만들지>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