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랜드 오브 플렌티'
같은 민족인 북한주민들의 삶에 대해 난 잘 알지 못한다. 같은 지구인 미국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자랑아니다. 부끄럽다. 그리고, 나의 무지를 북한을 적이라고만 가르쳐 주신 우리의 아버지들, 미국을 적이라고만 가르쳐 주신 우리의 선배님들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다.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진정으로 제대로 보려고 노력중이다. 그런데, 쉽지 않다. 진실은 늘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에게는 안 좋은 버릇이 생겼다. 미디어와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섣불리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3의 시선을 찾기도한다. 그 역시 제한적일지라도 사실을 제대로 보기위해 필요하며 도움이 되기도 하기때문이다.
그 노력의 하나로 몇 년 전 영국의 다큐멘터리감독 다니엘 고든이 만든 영화 '어떤 나라'와 '천리마 축구단'을 통해서 제한적이지만 제3의 시선으로 북한주민들의 삶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3의 시선으로 미국주민들의 삶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9·11테러 이후 미국 주민들의 삶을 그렸다는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랜드 오브 플렌티'(Land of Plenty, 미국, 독일, 2004)를 보게 되었다. 파스빈더 감독과 함께 전후 독일영화의 대표감독으로 손꼽히는 빔 벤더스. 그의 시선을 믿어보기로 했다.
영화는 라나의 귀향으로 시작된다. 선교활동을 하는 어머니를 따라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갔었던 라나. 이제 스무살이 된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삼촌을 찾아 LA로 온 것이다. 9·11테러를 다른 나라에서 겪었던 그녀의 손에는 어머니의 편지 한통이 들려있다.
그녀의 유일한 피붙이 폴 삼촌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었고, 그로 인해 휴유증을 앓고 있으며, 9·11테러이후 자신의 조국을 테러로부터 지켜야한다는 강한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최첨단 장비를 갖춘 벤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불철주야 테러용의자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10년 만에 찾은 풍요의 땅 자신의 조국이 빈곤과 기아로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이 라나에게는 놀랍다. 하지만, 글을 써서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라나에게 더 놀라운 건 그 빈곤과 기아를 알릴 기자들이 모두 이라크에 가 있다거나, 돈 되는 기사를 물러 나가고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선교원 '생명의 빵'에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하며 삼촌을 찾고 있던 라나는 그 선교원의 아랍인 하산의 죽음을 계기로 삼촌 폴과 만나게 된다. 터번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하산을 평소 테러용의자로 관찰 중이던 폴은 그가 총에 맞아죽은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죽은 하산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그의 이복형이 살고 있다는 트로나로 향하는 두 사람. 거기에서도 폴의 관심은 오직 테러범을 잡을 단서를 찾는 것뿐이다. 반면 라나는 하산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형과 함께 슬픔을 나눈다.
결국, 범인이 마약을 한 백인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때서야 폴은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폴과 라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조국으로 인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폴은 베트남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과 9·11테러 당시 비행기 안에 자신이 없어서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애국심으로 인해 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라나 에게도 9·11테러 이후 악몽은 수시로 찾아온다. 그 악몽은 테러로 인해 죽어간 사람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테러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던 그녀는 테러범들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질렀던 환호성에 놀랐던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여러 장소에서 많은 세계주민들이 자신의 조국을, 미국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은 그때부터 그녀에게 악몽이 되었던 것이다.
세계주민들이 미워하는 것이 3,000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범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이라는 사실이 폴은 믿기지 않지만, 자신의 고통을 함께 해준 라나의 말이라는 것이 마음에 남는다.
트로나를 떠나 뉴욕의 9·11테러 현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 폴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미행정부가 일으킨 전쟁을 감추기위한 것이든, 라나가 가지고 돌아 온 자유와 민주주의가 인류애라는 이름의 온정적인 것이든, 중요한 건 전쟁과 테러로인해 죽어간 이들이 더 이상 희생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라나가 들고 왔던 어머니의 편지에는 폴 삼촌에 대한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메시지는 다름 아닌 라나의 존재자체인 것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게 될 우리의 아이들이 걱정되요. 라나가 용기와 힘을 가지도록 가르쳐 주세요>
다니엘 고든의 영화를 통해서 북한주민들의 삶이 진정 자신들의 행복을 위한 것인지. 김정일이라는 지도자를 위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었다. 빔 벤더스의 미국주민 폴 역시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전쟁과 9·11테러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폴.
구소련의 붕괴가 마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자신들의 성과이며, 베트남전쟁에서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광고하는 미국, 그런 조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주민들. 그 이면은 어떤가? 그들의 삶 역시 부시라는 지도자를 위한 삶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 고든과 빔 벤더스 감독이 화해와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제3자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 역시 결코 지구주민들의 문제에서 남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진실을 보려는 부단한 노력. 화해와 평화를 전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할 것이다.
죽어간 하산의 말처럼, 우리가 어느 곳으로부터 온 것이기 이전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불화와 전쟁 역시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화해와 평화 역시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시작될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사실을 제대로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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