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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필진]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과 우수 어린 눈동자

등록 2006-06-20 13:41수정 2006-06-20 14:10

<태양은 가득히>와 알랭 들롱의 매력
<태양은 가득히>와 알랭 들롱의 매력
<태양은 가득히>와 알랭 들롱의 매력

부도덕한 인간 군상

‘양심’이라는 말을 한자어로 쓰면 ‘良心’이 되고, 영어로 쓰면 ‘conscience’가 된다. 그런데 ‘conscience’라는 말의 어원을 추적하면 ‘함께 안다’라는 뜻이 나온다고 한다. 즉, ‘양심’에 호소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감하는’ 바 그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은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를 안고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보면 1959년 르네 끌레망이 연출한 <태양은 가득히>는 양심과는 하등 거리가 먼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인물들은 ‘함께 공감하는 규칙’을 무참히 깨트려버리기 때문이다.

친구를 살해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 친구 행세를 철저히 하면서 친구의 애인마저 함락하는 톰 리플리(알랭 들롱 분). 친구 앞에서 애인과의 정사도 마다하지 않는, 유흥과 쾌락에 철저히 물든 재벌 2세 필립(모리스 로네 분). 애인이 죽은 후에 그 친구의 품에 스스럼없이 안기는 심약한 여인, 마르쥬(마리 라포네 분). 이렇듯 <태양은 가득히>에 나오는 인물들은 부도덕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배우’ 알랭 들롱

니노 리타의 감미로운 음악이 특히 인상적인 이 영화는 꽃미남 배우의 원조인 알랭 들롱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히트작이다. 알랭 들롱이 도대체 누구인가? 필자가 감히 단언하건대, 여태껏 등장한 남자 배우 중에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받은 배우는 알랭 들롱이 유일할 것이다.

또한 알랭 들롱 만큼 잘 ‘생겼다’라는 찬사를 많이 받은 남자 배우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은 60,70년대 한국의 수많은 여성팬들을 잠 못 들게 만들었다. 우수에 젖은 눈빛이란 말은 알랭 들롱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태양은 가득히>를 보면 알랭 들롱의 그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이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 아래 반짝이는 것을 실컷 볼 수 있다. 우수에 젖은 눈빛이 햇빛 아래 반짝인다? 말 자체로 보자면 이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우수에 젖은 눈빛이라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분위기에 어울린다. 그러나 <태양은 가득히>를 보면 분명 지중해의 눈부신 햇빛 사이로 비치는 알랭 들롱의 눈빛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눈빛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분노와 한탄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톰 리플리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왜 나는 그렇게 안 돼?’

톰과 필립의 불안정한 동거, 그리고 파국

톰과 필립은 고등학교 동기 사이이다. 돈이 궁한 톰에게 필립의 아버지가 필립을 미국으로 데려오라고 요청한다. 대가는 5천 달러. 톰은 곧 바로 필립이 있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그러나 필립은 톰을 기생충처럼 치부하며 철저히 무시하고 만다. 톰은 그런 필립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는데, 마침내 톰과 필립은 마르쥬를 대동한 채 요트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 중 생긴 사소한 시비로 필립은 톰을 바다에 빠트리고, 톰은 심한 화상을 입게 된다. 어느새 톰의 마음에는 필립에 대한 분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부러움이 자리 잡게 된다.

결국, 톰은 필립을 살해한 후 바다에 빠트리게 된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완벽한 범죄였다. 호화 요트를 끌고 항구로 돌아온 톰은 그때부터 철저히 필립의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투와 사인을 연구해서 완벽하게 재현한 톰. 마침내는 필립의 애인이었던 마르쥬의 마음까지 독차지하게 된다.

이제 톰에게는 사랑하는 여인과 막대한 재산, 그리고 나폴리의 강렬한 햇살을 즐길 권리만 남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관객들은 톰을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 오히려 필립이 잘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범죄자, 미워하기에는 너무 슬픈 범죄자가 바로 톰인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의 강렬한 라스트 신!

<태양은 가득히>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라스트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백색의 다이아몬드처럼 눈부신 백사장에서 코발트블루의 지중해 물결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술을 마시는 톰.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여인 마르쥬가 순백의 향을 풍기며 앉아 있다. 인간의 배신, 오욕 따위와 상관없는 자연의 의연함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매우 냉정한 영상을 표출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톰이 항구로 끌고 온 요트가 조선소에서 끌어올려지면서 영화는 일대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 극중 인물들과 관객을 철저하게 속인 이 장면으로 인해 알랭 들롱은 성공한 완전 범죄자에서 실패로 끝난 살인자가 되고 만다. 톰이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확신한 필립의 시신이 조선소 마당으로 끌어올려지게 된 것이다. 톰은 필립의 시신을 부대 자루에 담아 기다란 끈을 매단 채 바다로 던졌는데, 이 끈이 스크류에 감겨 있었던 것이다.

경찰의 지시로 전화가 왔다는 말을 전달하는 하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백사장에서 일어서는 톰. 그러나 그의 미소 띤 얼굴은 잠시 후에는 가장 비참한 얼굴이 되고 말 것이다. 영화는 톰이 미소를 띤 채 백사장에서 걸어가는 것으로 끝이 나고, 니노 리타의 감미로운 멜로디가 엔딩 크레딧 사이로 흘러나온다.

20세기의 신화, 알랭 들롱의 마력

알랭 들롱은 <태양은 가득히>에서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 같은 청년, 톰 리플리로 출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르네 끌레망은 <태양은 가득히>와 <금지된 장난>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연출한 감독이 되었다.

알랭 들롱은 참으로 다양한 배역을 맡은 신비로운 배우였다.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주로 살인범이나 범죄자, 사기꾼, 혹은 냉철한 살인청부업자나 스파이의 모습으로 퇴폐적인 분위기를 스크린에 가득 채웠다. 그가 맡은 역할은 도덕적으로 모호한 아름다운 청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가 맡은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우울하면서도 연민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였다.

톰 리플리도 그런 류의 캐릭터로서 알랭 들롱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로 가득 찬 인물, 그래서 우울하면서도 폭력적으로 변해간 톰 리플리. 관객들은 그가 필립과의 관계에서 점차 분노의 단계로 변해가는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새 관객들도 리플리를 닮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르네 끌레망 감독의 치밀한 구성력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구성력의 핵심에는 물론 알랭 들롱이 있었다.

20세기 최고의 배우 중 한명인 알랭 들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배우, 알랭 들롱. 엔딩 크레딧 사이로 흘러가는 니노 리타의 감미로운 멜로디와 그의 우수에 젖은 눈빛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태양은 가득히>는 1959년에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극적인 요소는 요즘 영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치밀하며, 더 재미있으며, 더 스릴을 느끼게 한다. 단 한 장면으로 모든 상황을 뒤집는, 그래서 반전의 묘미가 가득 찬 <태양은 가득히>에 푹 빠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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