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한 슬픔과 외로움 긴 울림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는 여자. 우체국 직원 정혜는 그런 여자다. 편지를 부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에게 미소로 인사하지만 정혜는 큰 소리를 내어 웃는 일이 없다. 종종 직장 동료들과 맥주집에 앉아 있지만 이야기는 두 동료 사이에서만 오간다. 혼자 사는 집에서 화초를 닦아도, 고양이 밥을 줘도 정혜와 꽃나무는 그리고 고양이는 친해보이지 않는다. 소파에 누워 넘어갈 듯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을 천천히 끄고 다시 천천히 일어나 밤새 켜놓았던 홈쇼핑 채널을 우두커니 처다보는 정혜에게 묻고 싶다. “무슨 생각해?” 그럼 정혜는 그 무심한 눈초리로 나를 우두커니 응시하다가 그냥 일어나 양치질을 하러 갈 것만 같다. 이윤기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여자, 정혜>는 도무지 사건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29살 여성의 일상과 내면을 따라가는 영화다. 누구나 그렇듯 그의 인생에도 한두번의 큰 사건이 있었다. 고요한 일상을 스치듯 등장하는 과거 장면에서 그가 어린 시절 고모부로부터 끔찍한 상처를 받았고 신혼여행 갔다가 다음날 혼자 집으로 돌아왔으며(그 이유는 전 남편도 엄마도 관객도 모른다), 엄마는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우연히 구한 칼을 들고 고모집에 찾아간 적도 있는 그이지만 생전의 엄마에게도 자신의 상처를 열어보이지 않았다. 집 앞에서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와 정성껏 영양식을 차려 주지만 슬쩍 다가와 자신의 발을 핥는 고양이를 꼭 안아주는 일도 없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의 정혜를 만들었다기 보다 감독의 말대로 정혜는 “원래 그런 여자”였던 것같다. 카메라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정혜의 일상을 가깝게 밀착해가면서 그의 내면으로 다가간다. 다가간다고는 해도 카메라가 길게 응시하는 건 곤히 잠든 정혜의 움찔거리는 손가락, 컵라면에 젓가락을 담가 입으로 넣는 모습 정도다. 표정은 여전히 무심한데 그 작은 움직임들에서 정혜의 슬픔과 외로움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도 모르게 그 진동에 심하게 감전돼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불이 켜져도 선뜻 엉덩이가 들리지 않는다. 이처럼 <여자, 정혜>는 대사나 격한 눈빛이 아니라 화초 잎을 닦는 정혜의 손가락, 작가였던 엄마의 책을 구해 조용히 책장 안에 끼워넣는 뒷모습이 깊은 감정을 실어나르는 영화다. 대부분의 장면이 길게찍기(롱테이크)로 이어지면서도 정혜의 바로 옆에서 들고찍기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지나치게 침잠될 수 있는 분위기와 소극적인 감정표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정혜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어느날 정혜에게 난데없는 저녁식사 초청을 받았다가 바람을 맞혔던 작가 지망생(황정민)은 어느날 난데없이 정혜를 찾아온다. 딱 한번의 대화에서 정혜가 “저기요”라고 불렀던 그의 이름을 정혜도 관객도 모른다. 사과하는 그에게 정혜는 예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정혜는 남자를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외면했을까. 이제 정혜가 연애도 하고 고양이도 어루만져 주고 살면 좋으련만 왠지 그럴 것같지 않다. 정혜는 내일도 우체국에서 무표정한 미소로 그저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있을 것만 같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엘제이필름 제공.
“답답하죠? 저도 그랬어요” ‘여자, 정혜’ 로 스크린 데뷔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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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예요?” “밝은 영화는 아니예요.” “그래도 궁상떠는 영화는 아니죠?”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을 걸요.” 표정을 잡기 위해 사진기자가 건네는 말에 정혜를 연기한 김지수(33)의 대답이 솔직하고 시원시원하다. 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정혜와 한참 달라보인다. 정혜와 김지수가 함께 앉아 있으면 김지수는 “아휴 답답해, 얘기 좀 해봐” 채근할 것같다. 성격이 정반대인 쌍둥이 자매를 만나는 느낌이다. “정혜에게 연민이 느껴져서 선택했지만 막상 촬영 초반에는 힘들고 답답했어요. 감독님 말씀대로 본래 제 성격은 명쾌하고 씩씩한 편인데 정혜는 그렇지 않고, 정혜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이 친구는 스스로 불행하다거나 고독하다거나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게 안타깝고 문득 화가 나서 때로는 미움까지 들었죠.” 화면 속에서 정혜는 늘 표정없이 조용히, 그리고 대개는 천천히 움직인다. 남자에게 바람맞고 차갑게 식은 저녁식사를 하는 장면, 정혜는 처음에 밥알을 몇개 오물오물 씹다가 반찬 하나의 비닐을 벗겨 집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한개 더 열고, 조금 있다가 국 뚜껑을 연다. 아무 것도 아닌 그 손짓 하나하나가 배신감도 슬픔도 좌절도 아닌, 또는 그 전부이기도 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초단위로 끊긴 연기 연출일 거라 생각했다. “시나리오에는 ‘밥먹는다’ 이게 전부였어요. 다른 장면도 ‘화초를 닦는다’, ‘책을 꽂는다’ 이런 식이었구요. 그 장면에서도 정혜는 막 화를 내지도 갑자기 우울해지지도 않았을 것같고 그렇다고 해놓은 밥이나 잘 먹자 이런 감정도 아니었을 텐데, 정말 막연하게 더듬어가면서 했어요.” 드물게 정혜의 감정이 고조되는 몇 장면은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거야’ 싶을 만큼 금방 찍었지만 도리어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정혜를 연기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장면이라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할 수는 없잖아요.” <여자, 정혜>는 14년차 ‘탤런트’ 김지수의 첫 영화다. 텔레비전에서 안정된 영토를 가진 여배우가 영화에 뛰어든 것도, 첫 영화를 검증받지 않은 신인감독의 작품으로, 그것도 흥행 코드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영화에 출연한 것도 다 모험으로 보인다. “작품성과 흥행성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한 시나리오를 만나기는 쉽지 않잖아요. 특히 저는 오랫동안 텔레비전만 해왔기도 해서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았고, 다 가질 수 없다면 어리지도 않은 나이에 어떻게 시작하는게 좋을까를 고민했어요. 저 정도 하려고 영화 안하고 있었구나 이야기는 정말 듣기 싫었고, 나를 시험하려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쉽지 않은 작품을 선택한 것 같아요.” 부산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등에서 호평을 받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나이가 어렸으면 독이 될 수도 있었을 것같다”고 말하는 그는 <여자, 정혜>라는 리본으로 묶여 충무로에 배달된 좋은 선물처럼 보인다. “당분간은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는 그의 차기작은 로맨스. 3월 도빌 영화제에 다녀온 뒤 촬영에 들어갈 이 작품은 <여자, 정혜>와 다르지만 “역시 조금은 우울한 사랑이야기가 될 것같다”는 게 그의 귀띔이다. 글·김은형 기자, 사진 탁기형 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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