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락-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Der Untergang / The Downfall, 독일, 2004)
2006년 6월 독일. 전 세계 주민들이 하나 되어 축구공과 자국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축제라는 월드컵을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1945년 4월 독일 베를린을 배경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최후를 다룬 영화 '몰락-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Der Untergang / The Downfall, 독일, 2004)
이 영화는 2004년 가을 독일 개봉 당시 독일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영국 및 전 세계인들로 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논란을 일으킨 영화이다. 논란의 이유는 그동안 히틀러에 대한 대다수 영화들이 그를 전쟁광이나 미치광이로만 보여주는데 반해 영화 ‘몰락’은 히틀러의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나치역사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교육시키며 과거사청산 문제에 대해 확실하기로 알려진 독일에서의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오나치즘과 역사왜곡, 영화가 가져올 파급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 '장미의 이름', '특전 U보트'의 제작자이자 이 영화의 제작과 시나리오를 쓴 베언트 아이힝거는 히틀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묘사자체를 터부시하고 있는 히틀러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전형적인 폭로에 기여할 수 있다고 밝힌다. 어쨌거나, 이런 떠들썩한 논란에 힘입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였고 아카데미영화제에도 초청되는 성과(?)까지 올리게 된다.
1945년 4월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함락되고 거리에는 게릴라전이 한창이다. 영화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지하 벙커로 피신한 히틀러와 나치 지도자들의 행적, 그리고, 히틀러 정권의 최후와 그의 권총자살이 있기까지 12일간의 일들을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와 함께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장장 두 시간 여 동안 유대인 학살의 기획자, 전쟁광, 나치 원흉으로 알려진 히틀러가 아닌 인간 히틀러, 그리고, 히틀러에 의해 자만과 폭력, 절대복종과 권력에 길들여 진 나치지도자들이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그들의 집단광기의 현장을 영화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인간 히틀러는 수전증이 있는 노쇠한 늙은이, 공포에 떨기도 하고 측근들과 농담을 즐기며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애쓰는 인간, 부인 에바와 여비서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작은 보답에 감격해하거나 눈물짓는 인간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종말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며 지하벙커에서 술과 권력에 취해있는 나치 지도자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는 선전부 장관 괴벨스와 그의 부인, 패배 앞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자살하는 군인들을 만날 수 있다. 영화는 히틀러를 짝사랑했던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로 시작해서 그녀의 회고와 함께 끝이 난다.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단지 호기심으로 히틀러의 개인비서를 자원했고 전쟁이 끝난 후 전쟁범죄인을 처벌하기위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재판을 보면서도 이 거대한 범죄와 자신의 과거를 연관 짓지 않았다. 그 범죄에 대해 개인적인 범죄는 없었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하지만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중 소피 숄이라는 여인의 기념비를 보게 되고 자신이 히틀러 편에 섰던 그 해에 여인이 처형당했음을 알고 깨닫게 됐다고. 젊음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 진실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작자 베언트 아이힝거의 말처럼 영화에서 보여 지는 히틀러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인 그가 야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 역시 언제 그런 야수로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게 해주었다. 누구나 히틀러와 같은 야수가 될 수 있으며 나치 지도자들 처럼 권력에 의해 파괴와 파멸로 치닫는 집단광기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제작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이 위험한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에는 권력과 절대복종에 길들여진 나치지도자들의 집단광기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었지만 그 광기의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여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전 세계주민들이 하나 되는 축제라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며 그들의 열광을 국가주의와 자본이라는 권력에 길들여진 집단광기로 매도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열기가 전 세계주민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평화와 축제의 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볼 뿐이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집단열정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고통을 나누기위해 애쓰고 있는 여러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 열정이 단순히 집단광기가 아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되어 외치는 대~한민국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장장 두 시간 여 동안 유대인 학살의 기획자, 전쟁광, 나치 원흉으로 알려진 히틀러가 아닌 인간 히틀러, 그리고, 히틀러에 의해 자만과 폭력, 절대복종과 권력에 길들여 진 나치지도자들이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그들의 집단광기의 현장을 영화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인간 히틀러는 수전증이 있는 노쇠한 늙은이, 공포에 떨기도 하고 측근들과 농담을 즐기며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애쓰는 인간, 부인 에바와 여비서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작은 보답에 감격해하거나 눈물짓는 인간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종말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며 지하벙커에서 술과 권력에 취해있는 나치 지도자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는 선전부 장관 괴벨스와 그의 부인, 패배 앞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자살하는 군인들을 만날 수 있다. 영화는 히틀러를 짝사랑했던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로 시작해서 그녀의 회고와 함께 끝이 난다.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단지 호기심으로 히틀러의 개인비서를 자원했고 전쟁이 끝난 후 전쟁범죄인을 처벌하기위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재판을 보면서도 이 거대한 범죄와 자신의 과거를 연관 짓지 않았다. 그 범죄에 대해 개인적인 범죄는 없었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며. 하지만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중 소피 숄이라는 여인의 기념비를 보게 되고 자신이 히틀러 편에 섰던 그 해에 여인이 처형당했음을 알고 깨닫게 됐다고. 젊음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 진실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작자 베언트 아이힝거의 말처럼 영화에서 보여 지는 히틀러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평범한 인간인 그가 야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나 역시 언제 그런 야수로 돌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갖게 해주었다. 누구나 히틀러와 같은 야수가 될 수 있으며 나치 지도자들 처럼 권력에 의해 파괴와 파멸로 치닫는 집단광기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제작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이 위험한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에는 권력과 절대복종에 길들여진 나치지도자들의 집단광기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었지만 그 광기의 중심에는 히틀러가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보여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전 세계주민들이 하나 되는 축제라는 월드컵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며 그들의 열광을 국가주의와 자본이라는 권력에 길들여진 집단광기로 매도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열기가 전 세계주민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평화와 축제의 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볼 뿐이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집단열정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고통을 나누기위해 애쓰고 있는 여러 현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 열정이 단순히 집단광기가 아니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되어 외치는 대~한민국이 진정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