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지난달 28일 막을 내린 제59회 칸느영화제는 나에게 두 가지 흐뭇함을 가져다주었다. 그 중 하나는 두 노장 감독의 수상소식이다. 켄로치 감독이 '보리밭을 휘젓는 바람'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볼베르'로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목할 만한 시선부문에서 신인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 후보에 우리영화가 오른 것이다.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지난 해 말 개봉된 이 영화는 우리의 군대문화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조적인 폭력집단인 군대에 의해 죽음으로 내 몰린 한 젊은이를 보면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의 일상화 된 폭력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볼 수 있게 해준 영화였다.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이 정당화되는 곳. 군대. 승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
던 것일까.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이해 할 수는,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미 병장으로 복역 중이던 중학교 동창 태정의 말대로 '고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되는데, 승영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불합리한 폭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영을 제외한 다른 부대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불합리한 폭력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군대에서의 불합리한 폭력은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현실의 규칙일 뿐인 것이다. 잠시 불쾌하고 고통스럽지만 가끔은 억울하고 더럽지만 누구나가 용인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규칙. 때가되면 나에게도 똑같이 그 폭력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지는 공정한 규칙. 이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그러해야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규칙. 제 아무리 불합리한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종료되는 규칙. 조직에서 당당히 살아남아 인정받고 사랑받는 부대원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규칙. 그래서, 그들은 시키는 대로 거기에다 적당히 알아서 기면서 최고의 부대원으로 살아 남기위해 누가 만들었든 불합리하든 폭력적이든 정해진 기간 동안만 그 규칙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런데, 승영은 알아서 기지는 않더라도, '고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군대라는 조직의 불합리한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이해는 고사하고, 오히려 조직의 가장 큰 죄인 하극상을 일삼기가 일쑤다. 그런 상황에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중학교 동창 태정 덕분이다. 태정은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병장으로 그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소 승영의 행동과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승영은 모든 부대원들에게 눈의 가시가 되어가고, 결국 태정은 조직의 유지를 위해 군대 고참으로써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제대를 앞둔 태정은 잘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는 승영을 걱정하며 '먼저 어른이 되어야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태정이 떠나고, 승영은 현실의 규칙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아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그 규칙을 넘어서 이제 알아서 기기까지 해가며 조직을 받아들이고 고참들의 불합리한 폭력을 흉내 내게 된다. 생존의 위기가 가져다 준 본능적인 행동들이었을까. 이제 서야 승영은 남들 다 아는 조직에서 살아남는 생존방식을 익힌 것일까, 그것이 태정이 말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분명한 건, 결코 후임병들에게는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던 그가 더욱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마침내, 그 역시 자신이 이등병시절 그토록 경멸했던 선임병들의 불합리한 폭력을 흉내 내고 있는 평범한 군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다른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 그에게 강요한 불합리한 폭력을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살아 남기위해서.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불합리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구조적인 폭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넘어설 방법을, 견뎌 내야할 이유를 알지 못했고, 결국, 그는 자살하게 된다. 드디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조직에서 살아남아 어른이 된 승영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태정의 여자친구에게 '그것도 폭력이예요'라고 말하는 승영. 그의 죽음이 평소 폭력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아주 예외적인 젊은이의 경우에 해당될 뿐일까? 승영 역시 구조적이고 일상화 된 폭력이 만들어 낸 희생자는 아닐까? 영화는 군대라는 구조가 만들어 낸 폭력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구조 밖으로 내 몰릴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구조적인 폭력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있다. 행여 군대라는 특수성을 들먹이며 예외적인 경우라고 위안 삼겠다면 폭력적인 군대문화를 이겨낸 이들이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가? 내가 받았다는 이유로 똑같은 폭력을 남에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폭력이 일상화 되어버려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해 준 영화였다. 비록 영화제에서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우리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승영을 제외한 다른 부대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불합리한 폭력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군대에서의 불합리한 폭력은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현실의 규칙일 뿐인 것이다. 잠시 불쾌하고 고통스럽지만 가끔은 억울하고 더럽지만 누구나가 용인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규칙. 때가되면 나에게도 똑같이 그 폭력을 행사할 기회가 주어지는 공정한 규칙. 이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그러해야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규칙. 제 아무리 불합리한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종료되는 규칙. 조직에서 당당히 살아남아 인정받고 사랑받는 부대원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규칙. 그래서, 그들은 시키는 대로 거기에다 적당히 알아서 기면서 최고의 부대원으로 살아 남기위해 누가 만들었든 불합리하든 폭력적이든 정해진 기간 동안만 그 규칙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런데, 승영은 알아서 기지는 않더라도, '고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군대라는 조직의 불합리한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이해는 고사하고, 오히려 조직의 가장 큰 죄인 하극상을 일삼기가 일쑤다. 그런 상황에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그의 중학교 동창 태정 덕분이다. 태정은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병장으로 그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소 승영의 행동과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승영은 모든 부대원들에게 눈의 가시가 되어가고, 결국 태정은 조직의 유지를 위해 군대 고참으로써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제대를 앞둔 태정은 잘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는 승영을 걱정하며 '먼저 어른이 되어야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태정이 떠나고, 승영은 현실의 규칙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아니,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그 규칙을 넘어서 이제 알아서 기기까지 해가며 조직을 받아들이고 고참들의 불합리한 폭력을 흉내 내게 된다. 생존의 위기가 가져다 준 본능적인 행동들이었을까. 이제 서야 승영은 남들 다 아는 조직에서 살아남는 생존방식을 익힌 것일까, 그것이 태정이 말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분명한 건, 결코 후임병들에게는 불합리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던 그가 더욱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마침내, 그 역시 자신이 이등병시절 그토록 경멸했던 선임병들의 불합리한 폭력을 흉내 내고 있는 평범한 군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떠한 다른 선택도 허락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 그에게 강요한 불합리한 폭력을 그는 거부할 수 없었다. 살아 남기위해서.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불합리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구조적인 폭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넘어설 방법을, 견뎌 내야할 이유를 알지 못했고, 결국, 그는 자살하게 된다. 드디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조직에서 살아남아 어른이 된 승영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태정의 여자친구에게 '그것도 폭력이예요'라고 말하는 승영. 그의 죽음이 평소 폭력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아주 예외적인 젊은이의 경우에 해당될 뿐일까? 승영 역시 구조적이고 일상화 된 폭력이 만들어 낸 희생자는 아닐까? 영화는 군대라는 구조가 만들어 낸 폭력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구조 밖으로 내 몰릴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구조적인 폭력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있다. 행여 군대라는 특수성을 들먹이며 예외적인 경우라고 위안 삼겠다면 폭력적인 군대문화를 이겨낸 이들이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가? 내가 받았다는 이유로 똑같은 폭력을 남에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폭력이 일상화 되어버려 그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해 준 영화였다. 비록 영화제에서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우리 영화임에 틀림없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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