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era Drake, 영국, 2004
영화 ‘베라 드레이크’
1996년 제1회 부산 국제영화제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되어 호평을 받았던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영국의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베라 드레이크(Vera Drake, 영국, 2004)는 낙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는 성실한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로 보였다.
1950년대 영국의 런던에 살았던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베라 드레이크. 그녀는 인자한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온화한 인상을 지녔다. 그리고, 남편과 장성한 딸, 아들, 이렇게 넷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성실한 가정주부이며 다른 집의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 숨겨진 과거의 아픈 흔적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딸 시드와 그녀의 남편이 될 레지를 축하하기위해 네 식구와 레지, 그리고, 남편의 동생 내외. 이렇게 일곱 명이 모여서 축하 파티를 하려는 순간. 손님이 찾아온다. 런던 경시청에서 베라를 조사하러 온 것이다. 성실하며 따듯한 주부로 살아 온 그녀에게 경찰이 찾아 온 것 자체가 모두를 놀라움과 혼란에 빠뜨린다.
그녀는 20년 가까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젊은 여성들에게 불법적인 낙태 시술을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아무 일 없었지만 그녀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해 준 한 여성이 병원에 실려가 죽을 고비를 맞게 되고 의사는 불법낙태 사실을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했던 것. 결국, 베라가 수많은 여성들에게 불법낙태를 해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경찰이 그녀를 체포하러 온 것이다.
그녀는 경감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을 하고 불벌행위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가 불법낙태를 통해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경감에게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그녀는 자신이 한 행위는 낙태 시술이 아니라 기댈 사람이 없는 젊은 여성들을 도와준 것 일뿐이라고 답한다. 결국 젊은 여성들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젊은 시절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 스스로 젊은 여성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불법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사회로부터 받게 될 비난이 두려워 임신사실조차 밝히기 힘든 그녀들에게 불법적이지만 그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받은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그녀는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법정에 선 그녀는 평소 성실한 가정주부였다는 사실과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이 참작 되어 1심과 2심에서는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3심에서는 그녀를 변호할 증인들이 아무도 출석에 응하지 않아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녀의 행동은 한 생명체를 죽이는 범죄행위였으며, 그것도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실형을 받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경찰도, 법원도, 주변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그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가 낙태시술을 했다는 사실, 그것도 불법시술을 했다는 사실만을 문제 삼으며 그녀를 비난 할 뿐이다.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숨겨져야 하고 결국 그녀들은 이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생명체에 대한 살인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폭력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은 자행되고 있는 데. 왜 그녀는, 또 다른 그녀들은 임신을 해야했는지, 왜 그녀는 그런 불법을 행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고통 받는 그녀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나? 아니, 그런 고통스런 그녀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확한 심판을 위해 온갖 법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인간에 대한, 성적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느냐는 의문과 그녀의 도움이 그녀자신과 다른 젊은 여성들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 주었을까 라는 의문은 나를 안타깝게 하지만, 그녀 자신이 겪은 불행을 다른 이들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행동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남달라 보였다. 그녀의 사위가 될 레지의 말처럼 내 주변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잘못과 고통의 이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래서 서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경감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을 하고 불벌행위 사실을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가 불법낙태를 통해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경감에게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그녀는 자신이 한 행위는 낙태 시술이 아니라 기댈 사람이 없는 젊은 여성들을 도와준 것 일뿐이라고 답한다. 결국 젊은 여성들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녀 역시 젊은 시절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 스스로 젊은 여성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런 불법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사회로부터 받게 될 비난이 두려워 임신사실조차 밝히기 힘든 그녀들에게 불법적이지만 그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받은 고통과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그녀는 도움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법정에 선 그녀는 평소 성실한 가정주부였다는 사실과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수사에 협조적이었다는 사실이 참작 되어 1심과 2심에서는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3심에서는 그녀를 변호할 증인들이 아무도 출석에 응하지 않아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녀의 행동은 한 생명체를 죽이는 범죄행위였으며, 그것도 합법적이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실형을 받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경찰도, 법원도, 주변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 그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가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가 낙태시술을 했다는 사실, 그것도 불법시술을 했다는 사실만을 문제 삼으며 그녀를 비난 할 뿐이다.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숨겨져야 하고 결국 그녀들은 이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생명체에 대한 살인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폭력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은 자행되고 있는 데. 왜 그녀는, 또 다른 그녀들은 임신을 해야했는지, 왜 그녀는 그런 불법을 행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고통 받는 그녀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나? 아니, 그런 고통스런 그녀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확한 심판을 위해 온갖 법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에 앞서 인간에 대한, 성적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느냐는 의문과 그녀의 도움이 그녀자신과 다른 젊은 여성들의 고통을 얼마나 덜어 주었을까 라는 의문은 나를 안타깝게 하지만, 그녀 자신이 겪은 불행을 다른 이들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행동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남달라 보였다. 그녀의 사위가 될 레지의 말처럼 내 주변 사람이 잘못을 했을 때,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잘못과 고통의 이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래서 서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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