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비디오드롬>이란 책을 통해 평론가들의 고매한 시각과 편견에 의해 선정된 영화가 아닌 지극히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선정된 영화들을 읽기 쉽지만 독창적으로 해석을 해 주었던 그.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묻혀 죽어가고 있던 비디오 가게에서 그가 되살려 낸 명작들을 찾아다니게 만들었던 그.
결국, 분단의 비극이 낳은 젊은이들의 아픔을 그린 ‘공동경비구역JSA’를 만들어 우리영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던 박찬욱 감독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건, 죄송스럽게도, 위의 책이나 영화가 아니라, 어느 라디오방송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가 말한 복수에 대한 영화 삼부작 중 첫 번째 영화인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작품을 내 놓았을 무렵, 라디오 DJ 배철수의 단도직입적인 질문, ‘왜 영화를 만드느냐’에 대한 그의 대답은 ‘분노’였다.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것을 배출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분노’가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출의 방법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영화 만들기였다.
그 순간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이야~ 참 행복하겠다’였다. 왜냐하면, 크기에 상관없이 우리사회의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을 '분노'를 배출할 확실한 수단을 그는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나서, 과연 그의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영화로 보여주겠다면서. 그 이후 그가 말하지 않아서 더욱 궁금해진 ‘분노’의 정체를 좇기 시작했다. 영화를 통해서.
그가 말한, 복수 삼부작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모두 개봉되었고, 그 영화들을 통해 보여 진 그의 분노와 복수에 대해 나는 이미 다른 글에서 나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의 새 영화 소식이 들려온다. 어떤 영화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분노와 복수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하다. 아래 글에서는 그의 복수 영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나의 분노와 복수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분노를 경험하게 되고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복수의 꿈을 실행하지 못한다. 분노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행동은 어려워진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위해서 해결 되어야 할 분노가 해결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일시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이어 질수도 있고, 불행히도, 엉뚱한 대상에게 자신이 받은 만큼의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키는 분노 유발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박찬욱감독의 경우처럼 자신의 분노를 예술적인 매체를 통해 승화시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누구나 예술가이며,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근거는 뛰어난 두뇌와 오감, 손, 발이라는 훌륭한 창작 수단을 지닌 우리의 몸, 그리고, 그 훌륭한 수단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광대한 자연을 대상으로 행하는 노동. 우리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집도 짓고, 음식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든다.
즉, 어떤 대상물에 나의 노동을 가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예술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예술 활동이며, 그 때문에, 그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멋지다, 아름답다. 그저 그렇다. 보기 싫다. 추하다. 등등의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 활동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그 활동의 결과에 따라 멋지다·훌륭하다·추하다 등등의 평가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자 동시에 자기가 의도한대로 노동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수를 단순히 폭력적인 행위로 머물게 해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통해서 예술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복수를 오히려 아름다운 삶의 동력으로 만들 수도 있을것이다. 그런 활동을 위한 시간부족과 경제적인 비용의 부담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예술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라는 생각을 조금만 바꾼다면, 굳이 시간을 따로내거나, 경제적인 비용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매일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일과 후에도 자신의 예술적인 능력을 뽐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예술 활동이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안주 삼아, 더 나은 예술 활동과 예술품을 위해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 어떤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 못지않은 현실적인 고민들을 나누고 있고, 그 어떤 정치인들 못지않은 훌륭한 정치적인 발언들을 하기도하며, 그 어떤 영화감독 못지 않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쏟아놓기도 하고, 그 어떤 소설가 못지않은 상상력으로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고, 그 어떤 가수들 못지 않은 노래실력을 뽐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시간과 경제적인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품들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우리의 태도를 조금만 능동적으로 바꾼다면, 그것이 영화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설이든, 우리의 분노를 멋진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예술 활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 결과물의 질에 관계없이, 그 예술 활동 자체만으로도, 또한 예술가로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복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분노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그래서 복수라는 단어 역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니, 분노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하기위해서라도, 분노를 야기하는 원인들이 발붙일 틈을 잃게 만들 수 있는 큰 힘으로써, 행복한 복수야말로 우리 모두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일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들을 진실 되게 드러내려고 애쓸 때, 가능할 것이며, 그때 이미 우리들은 스스로 만든, 훌륭한 예술품이 되어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 세상은 훌륭한 예술품으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우리들은 누구나 박찬욱감독처럼, 뛰어난 작품을 만들 정도의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승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예술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 있음'에 대한 근거는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껏,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왔던 것처럼. ‘될 수 있음’과 ‘될 수 없음’의 선택 역시 늘 우리의 몫이었지, 그 누구의 강요가 아니었다. 아니,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으며, 강요할 필요도 없고, 강요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단지, 서로가 더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예쁘게 뽐내면 된다. 나 멋있지? 멋지잖아? 멋있으면 더 멋있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멋있어지라고 정당하게 평가해주면 된다. 그뿐이다. 뭘 더 바라는가. 지금 내 옆에서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조카아이에게 속삭여 주고 싶다. 강민아~ 지금 너의 모습은 천사이며,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앞으로도 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천사의 길을 선택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자라주렴.
‘친절한 금자씨’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분노를 경험하게 되고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복수의 꿈을 실행하지 못한다. 분노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행동은 어려워진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위해서 해결 되어야 할 분노가 해결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일시적인 해결책을 찾게 된다.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이어 질수도 있고, 불행히도, 엉뚱한 대상에게 자신이 받은 만큼의 고통을 전가함으로써, 또 다른 분노를 일으키는 분노 유발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박찬욱감독의 경우처럼 자신의 분노를 예술적인 매체를 통해 승화시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누구나 예술가이며,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근거는 뛰어난 두뇌와 오감, 손, 발이라는 훌륭한 창작 수단을 지닌 우리의 몸, 그리고, 그 훌륭한 수단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광대한 자연을 대상으로 행하는 노동. 우리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집도 짓고, 음식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든다.
즉, 어떤 대상물에 나의 노동을 가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예술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예술 활동이며, 그 때문에, 그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멋지다, 아름답다. 그저 그렇다. 보기 싫다. 추하다. 등등의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 활동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그 활동의 결과에 따라 멋지다·훌륭하다·추하다 등등의 평가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자 동시에 자기가 의도한대로 노동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수를 단순히 폭력적인 행위로 머물게 해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통해서 예술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복수를 오히려 아름다운 삶의 동력으로 만들 수도 있을것이다. 그런 활동을 위한 시간부족과 경제적인 비용의 부담에 대한 불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예술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라는 생각을 조금만 바꾼다면, 굳이 시간을 따로내거나, 경제적인 비용을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매일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일과 후에도 자신의 예술적인 능력을 뽐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예술 활동이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안주 삼아, 더 나은 예술 활동과 예술품을 위해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 어떤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 못지않은 현실적인 고민들을 나누고 있고, 그 어떤 정치인들 못지않은 훌륭한 정치적인 발언들을 하기도하며, 그 어떤 영화감독 못지 않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쏟아놓기도 하고, 그 어떤 소설가 못지않은 상상력으로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고, 그 어떤 가수들 못지 않은 노래실력을 뽐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시간과 경제적인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품들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우리의 태도를 조금만 능동적으로 바꾼다면, 그것이 영화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설이든, 우리의 분노를 멋진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예술 활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 결과물의 질에 관계없이, 그 예술 활동 자체만으로도, 또한 예술가로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복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분노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그래서 복수라는 단어 역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니, 분노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하기위해서라도, 분노를 야기하는 원인들이 발붙일 틈을 잃게 만들 수 있는 큰 힘으로써, 행복한 복수야말로 우리 모두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일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들을 진실 되게 드러내려고 애쓸 때, 가능할 것이며, 그때 이미 우리들은 스스로 만든, 훌륭한 예술품이 되어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 세상은 훌륭한 예술품으로 가득해지지 않을까. 우리들은 누구나 박찬욱감독처럼, 뛰어난 작품을 만들 정도의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분노를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승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예술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 있음'에 대한 근거는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껏,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왔던 것처럼. ‘될 수 있음’과 ‘될 수 없음’의 선택 역시 늘 우리의 몫이었지, 그 누구의 강요가 아니었다. 아니,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으며, 강요할 필요도 없고, 강요받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단지, 서로가 더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예쁘게 뽐내면 된다. 나 멋있지? 멋지잖아? 멋있으면 더 멋있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멋있어지라고 정당하게 평가해주면 된다. 그뿐이다. 뭘 더 바라는가. 지금 내 옆에서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조카아이에게 속삭여 주고 싶다. 강민아~ 지금 너의 모습은 천사이며,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앞으로도 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천사의 길을 선택하는, 현명한 사람으로 자라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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