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로 본 동성애의 세계 ②
지난 글에 이어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 한 편을 더 소개한다.
엽기적인 발상으로 유명한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인데, 거기다가 흔치 않은 동성애까지 다루었으니 안봐도 알 만 하다는 생각으로 대부분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여자 ‘아사코’의 문란한 성 생활과, 또 한편에 서로 사랑하는 게이 커플 ‘가츠히로’와 ‘나오야’의 등장은 관객들의 기대와 우려 모두를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엽기적이라기보다는 생각보다 평범한 드라마같이 아기자기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관객들은 서서히 극 중 배우들의 캐릭터의 표정 하나에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된다.
문란한 성생활, 흡연, 무성의한 옷차림, 툭툭 던지는 직설적인 말투의 아사코는 어쩐지 일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여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다며 세상에 정을 줄 생각이 도저히 없어 보이는 아사코. 그러나 그녀는 문란한 성생활이 원인이 되어 자궁에 작은 종양이 생겨 수술까지 받게 되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변한 태도를 보인다. 낙태를 3번이나 한 상태에서 종양제거수술까지 받은 그녀의 몸은 자칫 아이를 임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아사코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아주 우연히 옆 테이블에 있던 ‘가츠히로’와 ‘나오야’의 대화를 듣게 되고 그들이 게이 커플임을 알게 된다. 그 중 가츠히로의 눈빛이 자신의 아버지와 닮았다고 느낀 아사코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아이를 낳자고 제안한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게이 커플보다 이 요상한 여자에 더 주목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사코의 논리는 이렇다. 어차피 나는 댁이 게이 커플인 것을 알고 있으니 나를 책임져달라고 구차하게 굴 생각이 없으며 나는 지금 아이를 갖고 싶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요상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어보이는 아사코의 막무가내 제안에 가츠히로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고 가츠히로의 애인 나오야는 일순간 위기의식을 느낀다. 나오야의 이런 위기의식이 영화에 직접적인 대사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선천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자의 몸으로 가츠히로를 사랑하는 자신이 여자인 아사코의 등장으로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던 탓일 테다. 그러나 아사코의 진실됨이 나오야에게 전달이 되면서 나오야도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그 셋은 함께 모여 직접적인 성관계를 가지지 않고 정자만을 채취해 수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아기 옷과 놀이기구 등을 파는 상점에 가서 구경을 하기도 하면서 실질적으로 아기를 가질 준비를 시작한다. 아사코보다 나오야가 훨씬 적극적으로 구경을 한다. 아기 옷이 보드랍다며 손에서 놓지 않는 그 모습이 괜히 짠해 보이는 건 나 뿐일까? “아이를 자신의 맘에 들게 선택해서 낳겠다는 건방진 여자군요. 엄마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예요. 그런 식으로 엄마가 되어서는 아이를 절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구요!” 사건 정황을 알아버린 가츠히로의 형수가 아사코에게 충고한 이야기이다.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들어도 옳은 말이다. 그러나 아사코도 지지 않고 덤빈다. 칼에 찔려 피가 철철 나도 눈 하나 껌뻑거리지 않을 것 같은 아사코가 그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처음에는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출산의 특권을 갖기 위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출발했을지라도, 지금은 가츠히로와 나오야와 함께 지내면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느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아기도 따뜻하게 키워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비정상’과 ‘정상’으로 나누거나, 편의상 그렇게 지칭하는 것에 꽤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기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통해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으로 보아야 하느냐 ‘정상’으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꼭 낳아 기르고 싶어하는 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모성적 욕구와, 원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신체적 구조에 있는 게이 커플이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욕구가 맞물렸다. 미묘하지만 아주 기막히게. 이것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이 내린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으로 이해해야 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런 불가능한 상황인 것을 서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그들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을 인위적으로 꾸며낸 심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때문에 이 관점으로 보면 동성애자들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몸’이냐 ‘마음’이냐인데, 이것이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닌 까닭에 골칫거리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올해 초 2월 유네스코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인권연수에서 만난 한채윤 강사님은 실제로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고 강의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동성애자들의 문제는 동성애자에게 있지 않고 이성애자에게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동성애자들은 자연스럽게 끌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는 것 뿐인데 그것을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받아들여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양심에 문제가 없고 떳떳하다고 여기는데 그들의 신체적 구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쩐지 치사한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순리를 어긋나는 것이 분명해보이는 동성애를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도 남아있고,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다고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동성애를 인정해. 그러나 나는 분명히 절대로 하지 않을거야.” 라던가, “나는 동성애자들을 이해해. 그러나 그들과 친구까지 하긴 좀 그래.” 라는 다소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와 같은 감정에 어떤 입장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동성애 영화 두 편 <브로크백 마운틴>과 <허쉬!>를 소개했다. 요즘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꽤나 낯선 소재이기 때문에 두 편으로도 완전히 소화해낼 순 없겠지만 동성애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제 스스로 고민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길 바라면서 이 꼭지를 마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 셋은 함께 모여 직접적인 성관계를 가지지 않고 정자만을 채취해 수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아기 옷과 놀이기구 등을 파는 상점에 가서 구경을 하기도 하면서 실질적으로 아기를 가질 준비를 시작한다. 아사코보다 나오야가 훨씬 적극적으로 구경을 한다. 아기 옷이 보드랍다며 손에서 놓지 않는 그 모습이 괜히 짠해 보이는 건 나 뿐일까? “아이를 자신의 맘에 들게 선택해서 낳겠다는 건방진 여자군요. 엄마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예요. 그런 식으로 엄마가 되어서는 아이를 절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구요!” 사건 정황을 알아버린 가츠히로의 형수가 아사코에게 충고한 이야기이다.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들어도 옳은 말이다. 그러나 아사코도 지지 않고 덤빈다. 칼에 찔려 피가 철철 나도 눈 하나 껌뻑거리지 않을 것 같은 아사코가 그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마도 처음에는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출산의 특권을 갖기 위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출발했을지라도, 지금은 가츠히로와 나오야와 함께 지내면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해 느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아기도 따뜻하게 키워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비정상’과 ‘정상’으로 나누거나, 편의상 그렇게 지칭하는 것에 꽤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기 적당한 말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통해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으로 보아야 하느냐 ‘정상’으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꼭 낳아 기르고 싶어하는 한 여성의 자연스러운 모성적 욕구와, 원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신체적 구조에 있는 게이 커플이 가정을 이루고 싶어하는 욕구가 맞물렸다. 미묘하지만 아주 기막히게. 이것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이 내린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을 ‘비정상’으로 이해해야 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런 불가능한 상황인 것을 서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그들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을 인위적으로 꾸며낸 심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때문에 이 관점으로 보면 동성애자들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몸’이냐 ‘마음’이냐인데, 이것이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닌 까닭에 골칫거리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올해 초 2월 유네스코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인권연수에서 만난 한채윤 강사님은 실제로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밝히고 강의 중간에 이런 말을 했다. “동성애자들의 문제는 동성애자에게 있지 않고 이성애자에게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동성애자들은 자연스럽게 끌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는 것 뿐인데 그것을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받아들여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동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양심에 문제가 없고 떳떳하다고 여기는데 그들의 신체적 구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쩐지 치사한 기분도 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순리를 어긋나는 것이 분명해보이는 동성애를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도 남아있고,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다고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나는 동성애를 인정해. 그러나 나는 분명히 절대로 하지 않을거야.” 라던가, “나는 동성애자들을 이해해. 그러나 그들과 친구까지 하긴 좀 그래.” 라는 다소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와 같은 감정에 어떤 입장인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동성애 영화 두 편 <브로크백 마운틴>과 <허쉬!>를 소개했다. 요즘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꽤나 낯선 소재이기 때문에 두 편으로도 완전히 소화해낼 순 없겠지만 동성애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제 스스로 고민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길 바라면서 이 꼭지를 마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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