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는 ‘세계공원’이라는 큰 테마파크가 있다. 넓은 땅에 파리 에펠탑, 런던의 빅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등 유명 문화유적들의 복사품이 전시돼 있다. 9·11테러로 뉴욕의 진짜 쌍둥이 빌딩은 무너졌지만 세계공원의 가짜 쌍둥이 빌딩은 살아남아 베이징 시민들의 발길을 기다린다. 개방 이후 세계인이 되고 싶어하는 중국 소시민의 호기심과 욕망은 가짜의 화려함으로 가득 찬 이 세계공원과 만나서 중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세계공원을 무대로 한 <세계>는 ‘지하전영’이라고 불리는 중국 독립영화의 대표기수로 꼽히는 지아장커의 2004년 연출작이다. 또 고향인 산시성을 주제로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이 처음으로 대도시로 카메라를 옮긴 작품이다. 매일 밤 세계 민속의상을 입고 공연을 하는 세계공원의 댄서 타오(자오타오)는 공원 경비원 타이셍(첸타이셍)과 연인 사이다. 세계공원은 두 사람처럼 도시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시골에서 올라와 고단하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는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세계>는 애정이 식으면서 다른 여자와 몰래 데이트를 하는 타이셍과 상처받는 타오를 중심에 놓지만 관심사는 그들의 연애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겹게 싸우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는 타오의 동료 커플, 단원들의 돈을 훔치다가 공원에서 쫓겨나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죽는 타이셍의 친척 동생, 나이든 공원 사장과 연애를 해서 매니저 자리를 꿰차는 타오의 후배 등 세계공원이라는 소우주에서 벌어지는 중국 젊은이들의 희로애락을 풍성하게 담아낸다. 타오와 동료들의 세계는 무대의상을 입었을 때와 벗었을 때로 나뉜다. 화려한 의상과 화장, 요란한 음악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그들의 표정은 세상을 다 거머쥔 듯 화사하고 즐겁다. 그러나 이것은 공연을 위한 연기일 뿐이다. 가짜라는 점에서 세계공원을 채우고 있는 복제품 유적들과 다르지 않다. 무대 분장을 지우고 여느 관람객처럼 공원을 거니는 그들은 마치 가짜 피라미드 옆에 서있는 진짜 낙타 한마리처럼 처연해보인다. 그러나 <세계>가 요란한 자본주의화, 개방화 물결 앞에서 가짜 욕망을 위해 젊음을 내던지는 중국 청춘들의 고달픈 내면에 머무르는 건 아니다. 친구의 집에서 가스를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진 타오와 타이셍이 “우리 죽은 거야?”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라고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당대 중국 젊은이들을 향한 감독의 애정을 함축해 보여준다. <세계>는 지아장커의 전작들과 달리 애니메이션 기법 등 새로운 시도들이 꽤 많이 들어가 있다. 특히 인물들이 말로 꺼내기 난처한 이야기나 질문들을 문자 메시지로 보낼 때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형식적인 실험으로 느껴지기보다 인물들의 스산한 내면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정서적인 역할을 한다. 2004년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작이며 지아장커는 올해 베니스에서 <스틸 라이프>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20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이모션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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