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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스파이더’ 거미줄처럼 뒤엉킨 진실 들추기

등록 2005-03-10 17:05수정 2005-03-10 17:05



기계 대신 인간 정신세계 탐험
2002 칸 초청 크로넨버크 걸작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2002년작 <스파이더>는 감독의 영화이력에서 튀는 작품이다. 텔레비전과 합성되는 육체, 자동차와 섹스하는 인간의 기괴한 섹슈얼리티 등 전작들이 열어보였던 ‘듣도 보도 못한’ 세계에 비하면 <스파이더>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첫장을 차분히 읽어나가는 느낌을 전한다. ‘분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전혀 동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기계나 테크놀로지가 놓였던 자리에 심연과 같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들어가면서 영화는 으시시하지만 우아하고 황량하지만 시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오랜 정신병원 생활을 마치고 런던의 요양소를 찾아온 클레그(랄프 파인즈)는 끊임없이 알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리고, 꽁꽁 숨겨서 다니는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는다. 그 기록이 그가 겪는 정신분열의 중요한 단서처럼 보이지만 클로즈업된 수첩의 글씨들은 알아볼 수 없는 부호들이다. 클레그는 요양소 주변을 배회하며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다시 만난다. 배관공이었던 아버지(가브리엘 번)와 정숙하고 유일하게 꼬마 클레그에게 상냥했던 엄마(미란다 리처드슨). 부모와 집으로 구성됐던 열살짜리 아이의 세계는 아버지가 술집의 성매매 여성과 바람이 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금발의 유혹자는 아버지와 공모해 어머니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는다. 영화는 성인이 된 클레그의 현재 시점과 유년기의 풍경 속에 목격자처럼 들어간 클레그를 교차하면서 그가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유폐돼 몇십년 동안 내면의 거미줄을 쳐왔는지 드러낸다.



중반까지 어두운 개인사를 탐사하는 것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뒷부분으로 갈수록 현재와 과거, 자의식과 외부 세계같은 통상적인 이야기의 구획을 허물어간다. 뛰어난 연기와 분장 탓으로 관객까지 무심코 넘어갔지만, 엄마와 성매매 여성이 같은 인물이었음이 점차로 드러나면서 이 모든 치정극은 클레그가 직조해온 거미줄의 일부였음이 드러난다. 그 거미줄은 아버지를 포함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굳건한 방패로만 믿고 있던 엄마의 섹슈얼리티를 훔쳐본 예민한 아이가 그 혼란을 감당하기 위한 방책으로 쌓기 시작한 자신만의 성이었던 것이다. 불안한 눈동자와 웅얼거림,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그가 털어놓은 진술과 들이대는 증거들이 어디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흐려지면서 관객은 그 은근한 망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로 인해 <스파이더>는 한 정신분열증 환자의 임상보고서가 아니라 현대인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완성된다. 이 회화의 테마인 거미줄은 꼬마 클레그의 방에서 부엌의 가스레인지 밸브로 이어지는 기억에, 클레그가 입원했던 병원의 깨어진 유리창에, 요양원의 지저분하고 허름한 방에 강박적으로 반복돼 나타난다.

2002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스파이더>는 주요 평단에서 크로넨버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를 허물던 그의 독특한 상상력에 열광했던 관객들에게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거나 젠 체하는 영화로 보여질 수도 있는 작품이다. 좋고 싫음을 떠나서 그만큼 도약 또는 변화의 느낌이 강하고 그래서 차기작 <폭력의 역사>에 대한 궁금증을 더 크게 일으키는 영화다. 11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하이퍼텍 나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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