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마지막 탱고’ 베루톨루치 작
1968년 프랑스, 집밖엔 ‘68혁명’
미숙아들의 낭만통해 조롱하는 듯
감독 뜻 보지 말고 네멋대로 봐야 〈몽상가들〉은 에로틱하다. 인체의 특정 부위를 노출시킨다고 해서 꼭 에로틱한 건 아니지만, 모자이크 없이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가 높다.(지난해 〈팻걸〉을 등급심의하면서 성기와 음모 노출을 허용한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이 영화도 수입된 필름 상태 그대로 ‘18살 이상 관람가’ 등급을 내줬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의 감독은 성을 다룬 영화 가운데 대표적 문제작으로 불리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73년)를 연출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다. 정확히 30년이 지난 2003년에 그가 내놓은 〈몽상가들〉도 에로틱한 화면에 어딘가 불편하고 위악적인 분위기를 섞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물론 〈파리…〉처럼 도발적, 공격적이지는 않다. 만 스무살의 두 남자와 여자 한명, 셋의 행동은 쾌락의 추구라기보다 유희에 가깝게 다가온다. 68년 파리. ‘68혁명’의 한 도화선이 된 앙리 랑글루아 파리 시네마테크 관장 해임 반대 시위장에서 미국인 어학연수생 매슈(마이클 피트)가 이자벨(에바 그린)과 테오(루이스 가렐) 쌍둥이 남매를 만난다. 셋은 시네마테크에서 살다시피 하는 시네필(영화광)이다. 영화를 얘기하면서 친해지고, 남매는 매슈를 집에 초대한다. 그날 밤 매슈는 남매의 집에 자면서 두 남매가 벌거벗은 채 껴안고 자는 걸 본다. 다음날 아침 남매의 부모는 멀리 여행을 떠나고 매슈는 그 집에 머문다. 성에 대해 스스럼없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남매의 모습에 당혹해하면서도 그들의 성적 유희에 가담하는 매슈는, 관객의 감정을 대변하는 관찰자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퀴즈를 내고 못 맞힐 경우 벌칙으로 강도 높은 성적 행동을 하게 하는 기이한 유희를 남매와 함께 하던 매슈는 조금씩 알게 된다. 남매의 유희가 의도된 일탈이 아니라, 성장을 덜한 미숙아의 자폐적 놀이였음을. 그리곤 다투기 시작한다. 여기서 관객은 매슈의 해석을 거부할 방도가 없다. 길버트 어데어의 소설을 각색해 이 영화를 만든 베르톨루치 감독은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 그 당시의 에너지를 수혈받을 수 있도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68혁명을 조롱하는 듯하다. 한 평범한 청년이, 일탈적일 만큼 자유분방한 남매를 만나 함께 겪는 성장통을 다룬 영화로 친다면 〈몽상가들〉은 무난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의 집 밖에서 68혁명이 벌어지고 있어야 하는지가 모호하다. 영화의 맥락만 가지고 읽으면 베르톨루치는 공동체와 개인의 동시 해방, 계급 혁명과 세대 혁명의 동시 달성을 꿈꾼 그 혁명이 미숙아들의 치기 어린 낭만이었다고 회고하고 싶은 것 같다. 달리 읽을 방도가 없다. 이 영화에서 시대에 대한 혜안이나 반성을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시대의 아이콘들은 숱하게 찾을 수 있다. 실제 68혁명 시위장면을 담은 기록 필름 안에 앙리 랑글루아, 장 폴 벨몽도, 장 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등의 모습이 보이고 수시로 〈네 멋대로 해라〉 〈쥴 앤 짐〉,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 같은 영화의 장면이 삽입된다. 남매의 방엔 마오쩌뚱의 사진이 걸려있고, 전축에선 제니스 조플린과 밥 딜런이 흘러나온다. 이런 시대의 아이콘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모습은 꼭 〈포레스트 검프〉같다. 〈몽상가들〉은 진지하기보다 가볍게, 감독의 의도를 분석하려하기보다 자기 식으로 자유롭게 해석하면서 볼 영화이다. 간단히 말해 풍성한 재료들을 잘 엮지 못한, 그러나 재료 하나 하나는 잘 보여주는 영화다. 25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프리비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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