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헌 날 위험한 갱 흉내, 무사 흉내로 시간을 보내는 꼬마 카를로스는 이삿짐 속에서 우연히 찾은 카우보이 사진에서 엄마가 침묵하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미국 서부영화의 스턴트맨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스키여행 중에 몰래 빠져나와 스페인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서부영화촬영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만난 할아버지는 서너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초라한 서부극쇼를 벌이는 퇴물배우일 뿐이다. <야수의 날> <커먼 웰스> 등을 만들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페인의 젊은 감독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의 새영화 <800 블릿>를 보면서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감독이 엄청난 서부영화광이구나’하는 것이다. <800 블릿>은 이제는 쇠락한 할리우드 서부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 스페인식으로 해석한 영화다. 믿거나말거나 한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턴트 대역을 도맡으면서 이스트우드와 우정까지 나눴다던 훌리안. 서부영화의 침체와 같은 스턴트맨이었던 아들의 사고사로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사는 그의 삶은 무너져가는 세트장 ‘텍사스 할리우드’만큼이나 황량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통제불능의 엉망인 동료들을 이끌고 쇼를 운영하는 그에게 카우보이로서의 자부심만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코딱지만한 전시관을 돌면서 열에 들떠 자신의 전성기를 회고하는 그에게 관광객이 이스트우드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합성한 거잖아요.” 놀려도 그는 “그때는 사진찍을 시간도 없었다”고 기죽지 않고 대응한다. 그러나 두려울 것 없는 그의 꿈을 무너뜨리는 건 바로 며느리다. 유능한 사업가인 카를로스의 엄마는 텍사스 할리우드의 부지에 대규모 놀이공원을 세울 준비를 하고 땅을 매수한다. 동료들은 보상금에 휘둥그레 눈이 돌아가고 훌리안만이 마지막 카우보이로 남아 세트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훌리안이 경찰과 대치해 총격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전성기 서부극에 보내는 헌사처럼 보인다. <800 블릿>은 서부극에 대한 서부극이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장르에 대한 자의식을 깊이 있게 담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가벼운 연민과 아이같은 그리움 정도로 서부극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대신 영화 중간에 파티를 벌이는 훌리안 일행이 술을 마시고 발광을 하듯 미친 사람들처럼 놀아제치는 장면의 소란함이 스페인 영화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25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프리비전 제공.
영화·애니 |
새영화 ‘800 블릿’ 마지막 카우보이, 서부극을 지켜라 |
허구헌 날 위험한 갱 흉내, 무사 흉내로 시간을 보내는 꼬마 카를로스는 이삿짐 속에서 우연히 찾은 카우보이 사진에서 엄마가 침묵하던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미국 서부영화의 스턴트맨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스키여행 중에 몰래 빠져나와 스페인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서부영화촬영소를 찾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만난 할아버지는 서너명의 관광객을 대상으로 초라한 서부극쇼를 벌이는 퇴물배우일 뿐이다. <야수의 날> <커먼 웰스> 등을 만들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스페인의 젊은 감독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의 새영화 <800 블릿>를 보면서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감독이 엄청난 서부영화광이구나’하는 것이다. <800 블릿>은 이제는 쇠락한 할리우드 서부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 스페인식으로 해석한 영화다. 믿거나말거나 한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턴트 대역을 도맡으면서 이스트우드와 우정까지 나눴다던 훌리안. 서부영화의 침체와 같은 스턴트맨이었던 아들의 사고사로 가족들과 인연을 끊고 사는 그의 삶은 무너져가는 세트장 ‘텍사스 할리우드’만큼이나 황량하고 초라하다. 그러나 통제불능의 엉망인 동료들을 이끌고 쇼를 운영하는 그에게 카우보이로서의 자부심만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코딱지만한 전시관을 돌면서 열에 들떠 자신의 전성기를 회고하는 그에게 관광객이 이스트우드와 나란히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이거 합성한 거잖아요.” 놀려도 그는 “그때는 사진찍을 시간도 없었다”고 기죽지 않고 대응한다. 그러나 두려울 것 없는 그의 꿈을 무너뜨리는 건 바로 며느리다. 유능한 사업가인 카를로스의 엄마는 텍사스 할리우드의 부지에 대규모 놀이공원을 세울 준비를 하고 땅을 매수한다. 동료들은 보상금에 휘둥그레 눈이 돌아가고 훌리안만이 마지막 카우보이로 남아 세트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훌리안이 경찰과 대치해 총격전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전성기 서부극에 보내는 헌사처럼 보인다. <800 블릿>은 서부극에 대한 서부극이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장르에 대한 자의식을 깊이 있게 담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가벼운 연민과 아이같은 그리움 정도로 서부극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대신 영화 중간에 파티를 벌이는 훌리안 일행이 술을 마시고 발광을 하듯 미친 사람들처럼 놀아제치는 장면의 소란함이 스페인 영화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25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프리비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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