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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3.24 16:03 수정 : 2005.03.24 16:03

“인상 쓰는건 싫어…내가 너무 쿨했나요”

이병헌에게선 마초의 냄새를 맡기 힘들다. 턱선이 강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큰 눈 때문인지, 환한 웃음 때문인지 그의 인상은 순하고 선하다. <번지점프를 하다> <중독> <누구나 비밀은 있다> 등 그의 출연작들도, 기센 남자들의 싸움으로 채워지는 남자영화와 거리가 멀었다. 오는 4월1일 개봉하는 <달콤한 인생>은 조직의 중간 간부가 보스와 불화가 생겨 조직 전체와 싸우게 되는 전형적인 남자영화다. 그러나 모처럼 남자영화에 출연해서도 그의 연기는 여느 주연급 남자 배우들과 다르다.

폭력조직 지적인 인물 선우역

얼굴 근육을 잔뜩 찡그리면서 분노를 드러내거나, 냉소적으로 이죽거리거나,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째려보는 일이 없다. 한마디로 표정을 통해 카리스마를 뿜어내려고 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절제돼 있고 경솔하지 않으며, 논리와 상식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눈빛이 진지하다. 이건 그가 연기한 선우가 폭력조직 안에서도 지적인 인물이라는 캐릭터의 특징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상적인 표정을 남기려고 애쓰지 않는 건 이병헌의 연기 스타일인 듯했다. “정말 화가 났을 때도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진 않잖아요. 표정을 잡아놓고 연기를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배우는 모델이 아니니까. 내 감정이 원하는 상태에 이르면 표정은 자연스럽게 나오겠죠.”

이런 연기는 이 영화를 이전의 한국 조폭 액션 영화와 구별짓게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 싸우는 이들의 격한 감정선에 관객이 동화되게 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빠져나오게 한다. 주윤발 시절의 홍콩 누아르보다 쿠엔틴 타란티노에 가깝게 다가온다. 그래서 <달콤한 인생>은 꼭 남자영화라고 부를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영화에서 이병헌은 싸움을 몹시 잘 함에도 마초같지 않다. 남자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대다수 남자 배우들이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저마다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표정을 연출하는 요즘의 충무로에서 이병헌은 드물어 보인다. 액션 누아르 영화에 나와서도 남자영화의 분위기를 지우면서 감성을 중립지대로 끌고간다.

액션 느아르인데 마초같지 않은

“여성적인 분위기의 영화에 맞는다고 할까, 그런 소리를 더러 듣죠. 슬퍼보이는 눈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 영화에서 그런 걸 의식하진 않았어요. 영화에서 싸움의 발단은 사소한 거잖아요. 선우는 왜 이렇게 파국으로 가는지 모르면서 끝까지 가죠. 원인을 모르면서 끝까지 가는 그 모호한 감정이 영화와 선우를 끌고가니까 그걸 살리려고 했어요.” 누아르라는 장르보다 김지운 감독을 원해서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병헌은 촬영 초기에 김 감독과 ‘살짝’ 이견이 생겼다. “누아르가 스타일리쉬하죠. 그게 사실적인 것과는 또 다르잖아요. 나는 사실적인 걸 중시하려는데, 감독의 입장에선 사실적인 것 못지않게 폼을 중시했죠. 선우는 조폭 중에서도 인텔리같은 인물이지만 가끔 무의식적으로 조폭 스타일이 나올 수 있잖아요. 여주인공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양팔의 상박과 다리를 벌린 채 조폭처럼 앉았거든요. 그랬더니 감독님 왈. 그거 아저씨같다. 하지 말자.”




김지운 감독은 뭐 폼생폼사죠

영화에서 시종일관 쿨했던 선우가 종반에 울먹이며 자기 처지를 늘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김지운 감독이 대단한 게 중요한 장면마다 한 다섯가지 버전으로 찍어놓는 거예요. 편집본은 열몇가지가 돼요. 촬영현장에선 쿨한 버전을 좋아하다가 편집실에서 ‘큰 일 났다, 우리 영화 너무 쿨해’ 그러더라고요. 영화 많이 보는 이들은 쿨한 걸 좋아하지만 일반 관객들은 또 다를 수 있잖아요. 선우가 울먹이는 장면도 첫번째는 쿨하게 찍었죠. 그리고는 핫한 버전으로 다시 찍었죠. (그러면 연기하기 힘들지 않냐고 묻자) 짜증나죠. 하지만 그런 게 많진 않았으니까. 또 저 스스로도 핫한 연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게 있었고.”

이병헌은 예상했던 대로 술먹고 개기거나 퍼질러져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감정 상태를 끝까지 가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본 적이 있어요. 그걸 통해 뭘 느꼈다고 하긴 어렵지만 앞으로 그런 사람을 연기할 때 좀 더 잘 하지 않을까요?”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달콤한 인생’은…

보스와 오른팔 갈등
화려한 액션 볼거리



선우(이병헌)는 폭력조직 보스(김영철)의 오른팔이다. 냉정하고 원칙적이다. 다른 주먹 패들과 협잡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적들이 생기지만 보스와 신뢰관계가 두텁다. 보스는 애인인 젊은 여자 희수(신민아)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걸 눈치채고 선우에게 감시하라고 시킨다. 그 남자와 진짜로 정분이 났다면 자기에게 보고하거나 알아서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선우는 정분이 난 걸 확인하지만 보스에게 보고하지도, 제거하지도 않는다. 희수에게 “없던 일로 할 테니 둘이 다시는 만나지 마라”는 말만 남긴다. 이게 화근이 돼 선우는 보스와 적들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당한다.

<달콤한 인생>의 얼개는 전형적이고 단순명쾌하다. 관전 포인트는 이걸 얼마나 멋스럽게 화면에 옮겨내느냐이다. 김지운 감독은 대사를 최소화하고서 배경이 되는 공간의 분위기와 화면의 질감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전달한다. 희수를 향한 선우의 미묘한 감정, 위험이 밀려오고 있는 데 대한 막연한 자각 같은 것들은 예측이 가능해서 전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의 화면은 눈에 띄게 때깔이 좋고 극 전개의 리듬도 적절하다. 조금씩 긴장을 높이더니 선우가 붙잡혀갈 무렵부터 탈출해서 복수를 준비하기까지 액션의 세례를 퍼붓는다.

이 중간부분은 장관이다. 액션도 화려하거니와 캐릭터들의 배치가 절묘하다. 냉철하고 절제력 있는 선우는 60년대 프랑스 누아르의 알랑 들롱과 스즈키 세이준 영화의 주인공을 섞어놓은 듯하고, 개성 강한 다른 주조연들은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인물들같다. 황정민, 김뢰하, 오달수, 김해곤의 빛나는 연기와 함께 <조용한 가족>에서 보였던 김지운식 블랙 유머도 살아난다. 영화의 스타일은 여러 나라, 시대의 누아르 영화들을 섞고 있는데, 그 깊이와 일관성을 따지기 이전에 보는 재미가 삼삼하다. 그렇게 쿨하게 끝까지 갔으면 좋았을 걸. 종반에 가서 설명이 많아지고 사족이 들러붙는다. 단순명쾌해서 좋은 페파로니 피자같은 영화에 굳이 멜로, 신파 등등의 토핑을 입히려 한다. 컴비네이션 피자 애호가들을 위한 배려로 볼 수도 있을 듯.

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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