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매우 불우한 두 남자
신인왕 복서만이 탈출구다
원…투…
한 주먹엔 카타르시스가
한 주먹엔 따스한 가족애?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는 서로 아무런 인연이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엇갈려가며 보여준다. 한 남자는 10대 후반이고, 또 한 남자는 40대 중반으로 연령대가 다르고 이렇다할 유사점도 없다. 단 한가지. 경로는 다르지만 둘은 삶의 막바지에 몰렸고, 권투를 그 탈출구로 삼는다는 점만 같다. 그래서 두 남자는 마지막에 딱 한번 만난다. 신인왕전 결승전의 두 선수로. 전혀 별개의 삶을 사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마지막 권투시합으로 엮는 이 특이한 구성의 연결 고리는 처절함이다. 10대 후반의 유상환(류승범)은 할머니, 홀아버지와 함께 세 식구로 지독히 가난한 삶을 산다. 또래 아이들 돈 뜯고 자동차 카세트 뜯어서 팔며 지내다가 소년원에 간다. 설상가상으로 막노동일 하던 아버지가 죽고 할머니는 몸져눕는다. 상환은 소년원 안에 있는 권투 도장에 나가면서 자신을 지탱해줄 유일한 희망을 본다. 또 한 남자, 강태식(최민식)은 젊을 때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복서다. 결혼하고 자식도 생겼지만 사업이 계속 실패해 집을 나왔다. 먹고 살겠다고 길거리에서 돈 받고 사람들에게 매맞아주는 일을 한다. 그 와중에 사기꾼이 들러붙고, 빚쟁이들이 찾아와 번 돈을 가져가고, 조직폭력배까지 간섭한다. 부인은 이혼하려 하고 더이상 밀려날 곳이 없어진 태식은 노구를 이끌고 신인왕전에 도전한다. 주먹에 모든 걸 거는 전형적인 남자영화인 〈주먹이 운다〉는 설정이 막무가내라고 할 만큼 단순하다. 두 남자가 막다른 길로 몰려가면서 처절함이 증폭되고 마침내 둘의 권투 시합에서 폭발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빚어내기를 의도한다. 처절함의 극한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란 어떤 걸까? 처절하다는 감정은, 감정이입이 됐을 때 자기연민으로 변하는 일종의 동정심이다. 그런 나르시스트적인 감상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첩혈쌍웅〉 같은 처절한 누아르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렀다. 〈주먹이 운다〉는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두 남자의 가족을 동원해 파편화된 그들의 삶을 위로하려고 한다. 이게 따듯하긴 하지만, 남자영화가 죽음을 피해 가족영화로 내달리는 건 이데올로기적으로 위험하다. 남자영화를 벗어나, 정글에서 이빨 드러내고 싸우는 수컷들을 찬양하는 남자 이데올로기의 영화가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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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는 반쯤 그 위험에 빠진다. 두 남자 중 상환의 이야기는 가족으로 봉합할 여지가 있다. 꼭 남자영화라기보다 절대 가난에 내몰린 한 소년의 성장기에 가깝고, 그 절박함에 무게감이 있다. 그러나 태식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상업적 코드의, 그것도 많이 과장된 남자영화다. 성격상 두 이야기는 하나의 결말로 만나기 힘들다. 이걸 하나로 봉합할 때 그 봉제선의 절반쯤이 남자 이데올로기로 채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인 듯하다. 그래도 마지막에 둘이 싸울 때 곁에서 가족을 비추는 연출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피하기 힘들다. 오래도록 열변하는 대목이 유달리 많은 최민식의 연기는 약간 위태로워 보인다. 식상하게 느끼는 관객이 있을 것 같다. 4월1일 개봉.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시오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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