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31 18:18
수정 : 2005.03.31 18:18
세속적이고 또 천진난만
결코 파괴되지 않는
펄펄뛰는 욕망들이여
마파도의 주인 할매들, 정말 대~단한 카리스마를 뽐낸다. 서울에서 잘 난 척 깨나 하던 뺀질이 비리형사와, 한여름에도 가죽재킷차림으로 ‘가오’ 잡기에 여념 없는 날건달도 이 할매들 앞에서는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꼼짝없이 무임금 머슴으로 복무할 정도다. 지금껏 한국영화 속에 (가뭄에 콩 나듯) 등장했던 ‘할머니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어 왔는지를 떠올려 보니 이 마파도 할매들의 엽기성이 더욱 선명히 도드라진다.
그동안 영화에서 늙은 여자는 대개 주인공의 할머니거나 잘해봐야 어머니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영화 밖의 현실에서도 그렇다. 55살 이상 나이든 여성의 삶에 관심을 드리우는 시선이 대체 존재하기나 하던가? 나이든 여성들은 욕망의 주체는커녕 욕망의 대상조차 되어보지 못했다. 판에 끼워주기만 한다면 그림자나 배경으로도 감지덕지해야했다. 두어 해전, 온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트렸던 <집으로>의 외할머니처럼 아주 가끔 영화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에도 ‘할머니’의 캐릭터는, 캐릭터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뻔하고 단선적이었다. 성모마리아도 울고 갈 듯한 완전무결한 모성으로 손자를 위해 가없는 희생을 베푸는 할머니.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야 더 애처로워 보이기 때문일까, 가난한 할머니는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에 기거했으며 허리가 굽었을 뿐더러 하필이면 청각장애인이어서 철없는 손자 녀석이 싸가지 없이 굴어도 안절부절 할뿐 마음껏 호통 한 번 치지 못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타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 사는 마파도 할매들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들은 갓 잡아 올린 숭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욕망의 소유자들이다. 첫날, 식사를 마친 건달 재철이 고맙다는 말 대신 건넨 만 원짜리를 회장 할매가 슬그머니 받아 챙겼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걸쭉한 육담과 욕지거리를 거침없이 쏟아낼 뿐더러 기회만 나면 총각들 엉덩이를 까보고 싶어 환장하는 이 할매들은 지독하게 세속적이고 지독하게 천진난만하다. 즐겁게 노동하고 즐겁게 먹으며 깔깔깔 즐겁게 웃는다. 육지에서는 제법 ‘있어 보이던’ 남성성의 대표선수 형사와 건달이, 이 무대뽀 할매들 앞에서는 한낱 ‘귀여운 아그들’로 전락하고 말 때 기존의 성별 위계질서와 힘의 등급은 스리슬쩍 전복되고 마는 것이다.
마파도는 육지 남자들의 침입으로 인해 한바탕 소동을 겪지만 결국 파괴되지 않는다. 할매들의 원초적 생명력을 자본(로또복권)과 공권력의 침탈 따위로는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이에 상관없이 한 개인을 자기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도록 하는 원동력은, 늙어도 늙지 않는 생생한 욕망과 최소한의 자기생산력일 것이다. 욕쟁이 진안댁의 말대로 인생이 신발 밑창에 눌어붙은 껌 딱지 같은 것일지라도 사람과 자연과 술과 환각이 어우러진 해방의 밤을 그토록 멋지게 즐길 수만 있다면, 욕망하며 노동하며, 어쨌거나 열심히 늙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야성의 섬 할매들이 오늘, 맥없이 축 늘어져있던 도시 처자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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