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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깃>

등록 2005-01-17 16:41수정 2005-01-17 16:41



‘당연하지 게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럼 게임’이라는 게 있다. 무슨 질문에든 ‘그럼’이라고 답해야 한다. 이 게임의 묘미는 명백한 거짓은 쉽게 답하지만 모호한 진심은 쉽게 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인이 “아저씨, 현상 수배중인 살인범이죠?” 하고 물을 땐 “그럼”이라고 주저 없이 답하던 ‘나’는 “아저씨, 서울 올라가면 이 모텔도 나도 다 잊을 거죠?”라고 물을 때, “그만 해요. 재미없어요”라고 말하곤 얼굴을 돌린다. 나는 진심을 말하지 못한다. 혹은 나는 나의 욕망을 모른다.

송일곤의 <깃>은 간결하고 섬세한 멜로이자 상처의 치유에 관한 예민한 기록이다. 화자이며 33살의 무명 영화감독인 현성(장현성)은 광주에서 ‘80년 광주’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려다가 첫사랑과의 10년전 약속을 불현듯 떠올리며 외딴 섬 우도로 왔다. 삼촌(조성하)을 도와 모텔을 지키는 해맑은 여인 소연(이소연)이 그를 맞는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만나러 간 외딴 섬
주술이 걸린다, 미래가…기적 시작된다

현성은 떠나간 첫사랑을 만나러 왔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곳에 새겨진 상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왔다. 그가 말하지 않는 그의 소망은 첫사랑의 잔존이 아니라 첫사랑의 부재다. 그녀의 도착을 방해할 비바람이 몰아치자 현성은 비로소 “기다리는 건 좋은 일이다”이라고 말한다. 그 말의 뜻은 ‘잊는 건 좋은 일이다’일 것이다.

첫사랑 대신 그녀의 분신인 피아노가 도착했을 때, 그는 혼란스럽다. 작은 평원과 그 너머 바다와 하늘의 푸른 빛으로 눈부시던 풍경의 한 곳을 피아노가 점유하면서 같은 풍경의 프레임은 이제 불편해진다. 피아노를 불안하게 덮은 비닐 포장이 비바람에 떨 때 그것은 필사적으로 되살아나려는 상실의 기억처럼 느껴진다. 현성은 과거로부터 ?피아노에 손대지 못한다.

현성에게 소연(이소연)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사랑이다. 피아노가 탱고를 사랑하는 소연에 의해 포장이 벗겨지고 소리를 낼 때, 비로소 현성은 그것의 존재 이유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이제 소연에게 속해야 한다. 현성은 피아노를 소연에게 준다. 바닷가에 묻어둔 사진도 피아노에 실려온 편지도 이제 태울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현성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거나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오랜 뒤에 소연은 나를 기억할까. 혹은 나는 그녀를 기억할까. 현성은 ‘그럼 게임’에서 진다.


소연에게 우도는 어머니가 묻힌 곳이다. 탱고는 그녀의 꿈이지만 그 꿈에 이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공작새의 깃이 날아왔을 때, 그녀는 그것을 꽂고 비로소 춤춘다. 깃은 그녀의 꿈이며 미래인 탱고의 환유다. 현성이 어머니의 무덤에 같이 돌을 쌓고 그의 탱고 파트너가 되어주었을 때 소연은 현성에게 자신을 잊지 않을지 물어본다. 그러나 1년 뒤에 만나자는 약속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삼촌 부부의 이별을 본 그녀 역시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 마침내 사랑을 되찾은 삼촌이 메신저가 되어줄 때까지.

<깃>은 주술의 멜로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만나러 간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과거와 조우하러 간 곳에서 미래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주술의 징검다리를 건너자 비로소 일어난다. 피아노가 폭풍우를 뚫고 외딴 섬에 도착하고, 공작새가 날아들며, 도미가 육지에서 낚여 오르자, 상처와 결핍은 치유의 길을 찾는 것이다. 그 주술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 기적은 시작된다. 불가능한 사랑을 주술로 꿈꾸는 이 영화는 송일곤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허문영/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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