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욕 그 자체일까. 보통의 질문 순서가 이렇다면 프랑스의 젊은 감독 세드릭 칸의 1998년 연출작 <권태>는 거꾸로 묻는다. 소유욕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프라하의 봄>에서 테레사가 사랑으로 인해 파생되는 소유욕에 고통스러워 하는 반면 <권태>의 주인공은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믿게 되면서 생기는 괴로움에 몸을 떤다. 히스테리컬한 대사와 과격한 행동으로 가득차 있는 이 영화의 제목이 어색하게도 <권태>인 까닭은 이 모든 감정의 격렬한 에너지가 모래사막처럼 권태롭기만 했던 주인공의 내면에서 반작용처럼 생성되기 때문이다. 40대의 철학교수 마르탱은 성 충동을 학문적인 성취로 ‘승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기 드물게 금욕적인 프랑스인이다. 우연히 술집에서 도움을 준 노인에게 그림을 선물받은 그는 포장지에 적혀있는 주소를 찾아갔다가 17살의 소녀 세실리아를 만난다. 짐을 챙기던 세실리아는 자신이 어제 죽은 노인 화가의 누드 모델이자 애인이었으며 화가는 자신과 정사를 나누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마르탱은 극단적인 상황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이 특이한 소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화가의 전사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마르탱은 자신의 권태 속으로 세실리아를 포섭하려고 한다. 그는 맹목적인 섹스를 세실리아에게 요구하고 순응하는 세실리아를 가학적으로 혐오한다. 그는 세실리아와 자신이 육체 뿐인 따분한 관계라고 강변한다. 당연하게도 영화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이들의 섹스는 에로틱하기 보다 기계적이다. 그러나 “말을 해도 소리가 안 나는” 것처럼 답답하고 둔해 보이는 세실리아가 자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르탱의 비웃음은 집착과 병적인 소유욕으로 바뀐다. 세실리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알자 마르탱은 미행과 캐묻기를 일삼으며 선물공세까지 하는 등 자신이 경멸하던 연애의 하급자 코스를 두루두루 밟는다. 소유욕에 휘둘리면서 체신을 잃어가는 마르탱의 행동은 마치 파리의 우디 알렌처럼 선병질적인 웃음을 자아낸다. 마르탱은 급기야 유일하게 확실한 소유의 제도적 징표인 결혼을 제안하기 이른다. 것도 상속재산을 미끼로 말이다. 영화적 정황으로 보면 그의 소유욕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혼제도의 기능을 이처럼 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찾기도 힘들 것같다. <권태>가 보여주는 삶의 진실은 간명하다.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를 소유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세실리아를 소유했다고 확신했을 때 마르탱은 이 ‘권태로운’ 관계를 끝내겠다고 노래를 한다. 그러나 세실리아가 다른 남자를 만날 때 그는 세실리아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실리아가 다른 남자와 헤어질 수 없다고 잘라 말하자 결혼해달라고 애걸한다. 끝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더 목말라지는 이 욕망은 모든 것이 완전히 파산하지 않는 한 절대로 제어될 수가 없다. 냉소주의자 마르탱이 냉정을 되찾고 자신을 직시하는 건 모든 것을 잃은 다음이다. <권태>는 에리히 프롬이 30년 전 논했던 ‘소유냐, 존재냐’의 질문을 남녀 관계의 연애버전으로 새삼 다시 묻고 있다. 17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백두대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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