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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 없었다” |
며칠 뒤면 한국전쟁 발발 55주년이 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이 사건은 휴전된 지 벌써 반세기가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한반도 곳곳에 그로 인한 아픔이 서려 있다.
남과 북이 여전히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상봉 행사 때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렇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펴낸 '한국전쟁'(책과함께)은 드물게 일반인을 위한 교양서를 지향하는 한국전쟁사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가 한국전쟁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시각과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저자는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도 아닌, 미국 사람도 중국 사람도 아닌 한 현대사 연구자의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권력'에 길든 기존의 한국전쟁 담론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 저자는 상대의 허를 찔러 전세를 단번에 뒤집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전투로 기억되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북한과 미국이 똑같이 실패를 저질렀다고 평가한다.
먼저 실수를 저지른 쪽은 북한군. 북한군은 모든 전력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시켰다.
이 전선만 뚫으면 38선 이남을 거의 다 장악한다는 장밋빛 희망에서였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초기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미군측이 저지른 실수는 서울 탈환 작전이 열흘 넘게 걸린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열흘 남짓한 시간이 없었다면 북한군이 만주에서 전열을 정비해 중국군과 함께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리에 도취한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한 것은큰 실패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중국의 참전을 불렀다.
미국은 이때 충격으로이후 10여 년 간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기를 꺼렸다.
중국군이 당시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해전술'도 사실 과장된 것이다.
중국군은 '장진호 전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한 차례 이와 유사한 전술을 펼쳤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미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당시 중국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맞서 싸웠다.
중국군은 주로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춥고 산악지대가 많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밤에 산을 타고 진군하는 전술에 익숙했다.
중국군 하면'인해전술'을 떠올리는 것은 장진호 전투 경험과 함께 중국군을 '짱꼴라'라고 비하하는 서양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나아가 한국전쟁이 외세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분단과 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외세에 의한 분할 점령이었지만 이는 필요조건이며, 분단을 하려는 외세의 힘에 부합하는 내부의 힘, 즉 충분조건이 있었기때문에 전쟁이라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408쪽. 1만6천800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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