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인은 너무 많다>
지난 12월14일 <악인은 너무 많다>라는 저예산 누아르 영화를 봤다. 배급사의 청으로 영화상영이 끝나면 감독과 주연배우가 참여하는 대담을 진행할 참으로 극장에 도착했는데, 안면 있는 사람들이 인사를 했다. 웬일이냐고 했더니 강제규 감독의 대작 <마이웨이>의 시사를 보러 왔다고 했다. 또다른 극장에서는 <미션 임파서블4>의 시사를 보러 온 일반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아무도 <악인은 너무 많다>란 영화가 개봉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제작비 5천만원, 12차 촬영으로 완성한 이 무모한 누아르 영화가 별다른 마케팅의 지원도 받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는 것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영화는 괜찮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고전 탐정소설을 연상시키는 플롯이 익숙하지만, 인천 밤거리를 주 무대로 한 이 영화가 곧잘 근사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는 게 놀라웠다. 배우 김준배는 <이끼>, <강적> 등의 영화에서 낯을 익힌 조연배우인데 이 영화에서 생애 처음 주연을 맡았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건달로 나온 그는 수상한 사건을 의뢰받아 함정에 빠진 채 혼자 힘으로 주변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는 연기를 하지 않을 때가 더 빛난다. 굳이 어떤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때가 더 그다운 매력을 풍겼다. 가만히 있어도 배우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에너지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사 도중 몇몇 사람이 자리를 뜨긴 했지만, 극장에 불이 켜지자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에 만족한 눈치였다. <악인은 너무 많다>를 연출한 김회근 감독과 김준배 배우는 솔직했다. 후반부의 전개가 가쁘다고 하자 감독은 시나리오에 있던 20여개의 장면을 제작비 문제로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액션을 꽤 잘하는 김준배란 배우가 나오는데도 액션 장면 완성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하필이면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난 당일에 중요한 액션장면을 찍다가 포기해버린 사연을 털어놓았다. 가장 큰 불운은 물론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에 비해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는 데 있다. 중요한 재능은 아주 자주, 돈을 모으는 능력이기도 하다.
몇몇 아쉬움을 제쳐놓고, <악인은 너무 많다>는 몇 장면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모든 게 종결되고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장면이 근사하다. 그 장면에서 김준배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홍등들이 불을 밝히고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 밤거리를 휘적휘적 걷는다. 영화 속 대사에 나오는 대로, ‘겉과 속이 너무 다른 도시’에서 산다는 것의 고독과 쓸쓸함, 용기를 이 장면은 훌륭하게 시각적으로 요약한다. 거리는 화려하지만 그 이면의 골목길은 축축한 부패와 욕망의 습기로 젖어 있는 도시에서 가진 것 없고 믿을 데 없는 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은 오늘도, 앞으로도 버티면서 살아갈 것이다. 배우 김준배는 특히 그 장면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는 그 장면을 칭찬하자 껄껄 웃으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남산에 올라갔을 때 불 켜진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이 차가운 도시에 자신이 누을 방 한 칸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청년시절의 마음이 잘 담긴 장면이라고 했다. 그와 이심전심을 나누는 관객이 적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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