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5000만원. 감독조차 “개봉은 생각도 못했다”던 영화. 29살 신인 감독의 장편데뷔작에서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27살 배우.
설문에 답한 이들은 영화 <파수꾼>과 배우 이제훈을 ‘올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과 배우’로 꼽았다. “영화의 힘은 자본의 크기와 스타 권력의 힘만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증명한 2011년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이라는 상찬도 따라붙었다.
<한겨레>는 국내 16개 영화홍보사(영화수입·독립영화 배급을 겸한 회사 포함) 직원 46명을 상대로 올해 영화계를 정리하는 설문조사(무기명)를 했다. 올해 국내외 개봉작을 홍보하고, 배우들의 언론 인터뷰를 진행하며 영화계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이들이다. 질문마다 복수의 답을 부탁했다.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올해의 작품’에선 <파수꾼>과 외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이 공동 1위(9표)에 올랐다.
<파수꾼>(감독 윤성현)은 죽음을 택한 한 학생(이제훈)의 아버지가 죽음에 의문을 품고 주변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아들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풀어간다. 미스터리 형식으로 접근한 영화는 소통의 부재가 불러온 고통과 비극을 파고든다.
응답자들은 “진심으로 가슴을 울린 영화” “두말 필요 없는 올해 최고의 데뷔작” “배우들이 가진 의외성과 진정성을 끄집어낸 감독의 재능” 등의 의견을 냈다. <파수꾼>은 독립영화 흥행기준선(1만명)을 넘은 2만1924명을 모았다. <혜화,동>(감독 민용근), <무산일기>(감독 박정범), <짐승의 끝>(감독 조성희) 등과 함께 올해 주류 상업영화가 시도하지 못한 소재와 문제의식을 펼쳐보이며 ‘잘 만든 작은 영화들’의 저력을 보여줬다. <파수꾼>은 서울 씨네코드 선재(27일), 서울 케이티앤지 상상마당시네마(29일, 내년 1월1일)에서 앙코르 상영할 예정이다.
<혹성탈출…>은 “인간보다 더 살아 있는 심리연기를 보여준 ‘시저’(주인공 침팬지)와 놀라운 컴퓨터그래픽” 등의 호평을 받았다. <만추>(“아프고, 따뜻하고, 설렌 영화”), <써니>(“영화가 엔터테인먼트로서 충실했던 재밌는 대중영화”), <완득이>(“자극적인 소재, 큰 사건이 없어도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 등이 5위 안에 들었다. 영화의 규모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캐릭터’와 ‘섬세한 이야기’가 요즘 관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분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국내외 기성·신인배우를 망라한 ‘가장 인상적인 배우’엔 <파수꾼> <고지전>으로 단숨에 충무로 샛별로 뜬 이제훈이 21표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가슴을 치는 배우를 발견했을 때의 흥분” 등의 호평과 함께, “인물의 감정 진폭을 다 표현했던 <파수꾼>에서의 열연을 뛰어넘어 줬으면”이란 당부도 같이 보냈다.
특히 응답자들은 <완득이>의 유아인(6표·“연기력, 스타성, 직업정신을 가진 젊은배우의 탄생”), <혜화,동>의 여배우 유다인(5표·“차세대 스타 재목” “돋보인 여배우가 드물었던 올해 가장 단단한 연기를 보여준 새로운 마스크”), <풍산개>의 윤계상(“대사 한마디 없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연기”), <써니>의 심은경(3표·“캐릭터를 완전 이해한 당찬 신인”) 등 젊은 배우들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한국영화 <만추>에 출연한 중국 여배우 탕웨이(6표·“부서질 듯, 처절했던 연기는 압권”)도 높은 사랑을 받았다. <완득이>의 김윤석(5표·“손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진 배우”)은 스타배우들의 체면치레를 했다.
개봉 전부터 막대한 제작비 등에 쏟아진 기대와 달리 내실이 부족했던 ‘빛 좋은 개살구 영화’엔 100억원대 입체(3D)영화 <7광구>가 최다표(31표)의 불명예를 썼다. “괴물 때문에 괴로운 사람에게도 사연은 있어야 한다”“‘최초’, ‘최대’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응답들처럼, 이야기와 인물을 세공하는 세심함이 부족했다는 평들이었다. 한 응답자는 “(3D 등) 트렌드를 좇기 급급한 대형 기획 프로젝트의 가장 안 좋은 예를 보여준 가장 바람직한 예”란 역설적 표현으로 ‘규모의 영화’가 빠지는 함정을 꼬집었다.
송강호·신세경이 출연하고, 이현승 감독이 연출한 <푸른소금>(16표)도 “스토리 빈약, 감정 없는 영상”이란 의견들이 다수였다. 추석 코미디영화로 ‘맞춤기획’된 <가문의 영광4>(7표)에 대해선 “미안하지만, 올해 최고의 ‘기획성 먹튀’”란 혹평이 나왔다.
고액 출연료, 스타성에 비춰 흥행성적 등에서 아쉬움을 산 ‘올해의 민망한 배우’ 1위엔 남자배우 김주혁(10표)이 뽑혔다. 올해 <적과의 동침>(24만명) <투혼>(21만명) <커플즈>(36만명)에 주연으로 나왔지만, 세 작품 통틀어 100만명을 넘기지 못한 저조한 성적 탓이다. “부지런히 잽을 날리지만, 한방이 없다” “식상해질 수 있다”는 평이 많았다.
<7광구>의 흥행부진은 주연 여배우 하지원(9표)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자꾸 여전사의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은 아닌지?”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흥행을 까먹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충무로에서 6억원대 최상급 출연료를 받는 <푸른소금>의 송강호(9표·“자꾸 색깔을 잃어가는 듯하다”), <카운트다운>의 전도연(6표·“도전과 도발보다, 예측가능한 연기였다”)에게도 ‘익숙함’을 넘어서는 모습을 원했다.
응답자들은 여배우의 활동공간이 좁아진 충무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젊은 여배우들의 선전도 기대했다. <통증> <적과의 동침>의 정려원(“뻔한 캐릭터의 느낌을 바꿀 이미지 전환이 필요하다”), 용서를 주제로 한 <오늘>에 출연한 송혜교(“작품의 무게에 눌린 느낌”) 등에 대한 우려는 그런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한 응답자는 <너는 펫>의 장근석에 대해 “스타와 엔터테이너로서 갈 것인가, 배우로 더 각인시킬 것인가?”라고 물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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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에 응한 곳(16개사 46명)더홀릭컴퍼니, 엔디크레딧, 언니네홍보사, 올댓시네마, 영화인, 영화사 하늘, 영화사 숲, 이가영화사, 딜라이트, 퍼스트룩, 무비앤아이, 프리비젼(이상 국내외 영화 홍보·마케팅), 판씨네마(외화 수입·배급·홍보), 영화사 진진(배급·홍보), 인디스토리(독립영화 제작·배급·홍보), 시네마달(독립영화 제작·배급·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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