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윤 감독은 “같이 행복하게 잘 살자고 제안하는 것이 영화가 아닌가”라고 말하더니, “(20여년간) 극장용 장편 애니 한편 만들어놓고 이런 얘기를 참…”이라며 웃었다. 연상호 감독은 “한국도 애니에 10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한다”고 했다. <돼지의 왕>의 연상호 감독,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 임범 대중문화평론가(왼쪽부터)가 선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오성윤·연상호 감독, 임범 문화평론가 ‘2011 한국 애니’를 말하다
올해는 한국 애니메이션이 ‘좌절과 냉대의 문턱’을 넘어 관객과의 소통 지점을 찾은 한해였다. 한국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 관객 200만(220만명)을 돌파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하 암탉·감독 오성윤), 서정적인 그림과 이야기를 풀어낸 <소중한 날의 꿈>(감독 안재훈), 성인 장르로 폭을 넓힌 독립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감독 연상호) 등이 일군 결과다. 외화를 벌어다 줄 문화상품 정도로 취급받던 한국 애니메이션을 관객의 정서를 움직일 영화 작품으로 인식을 확장시킨 계기도 됐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가 26일 서울 인사동 선술집에서 오성윤(48), 연상호(33) 감독과 만나 한국 애니메이션의 ‘2011년 도약’이 던진 의미들을 물었다.
냉대 넘어 관객과 소통 성공
“‘한국 애니메이션? 3D(입체영상)도 아니고, 2D를 누가 보냐?’며 투자자들한테 문전박대를 당하곤 했죠. 그래도 요즘엔 투자자들이 기획서라도 한번 들춰본다더군요.”(오성윤 감독)
들춰보게 한 변화도 성과라지만, 그는 ‘이 정도’에 자족할 순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말 끝에 오 감독은 정종 한잔을 목 안으로 털어넘겼다. “실사영화에서 볼 수 없는 시각적 경험이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이 주류 영화계에서 보여줄 게”, “너무 많다”는 두 말 사이에 그는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란 간절한 심경을 끼워넣었다.
임범 평론가가 <암탉>이 세운 애니 관객 동원 신기록 얘기를 꺼냈다. 오 감독은 “애니 업계 사람으로서 좀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2007년 <태권브이 디지털복원판>(72만명) 기록을 깬 건데, (최근 신작이 아닌) 옛 애니메이션 복원판을 넘어선 것으로 새 역사를 쓴 것 아니냐”며 몸을 낮췄다.
“2D 그림으로 한국 정서에 맞게 이야기를 잘 풀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3D 입체영상이냐, 아니냐의 테크닉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 걸 확인한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돼지의 왕>은 또다른 결실이다. 계급의 폭력에 억눌린 약자들이 ‘변화의 주체’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문제의식을 1억5000만원 저예산의 틀에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연 감독은 “커가는 성인 장르 영역이 애니메이션의 새 (시장)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전화에 저장한 한 인물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 후속작 주인공”이라며 웃었다. “사이비 종교를 다루는 성인 장르인데, 악인이 진실을 말하고, 선한 사람이 거짓을 얘기하는 작품이죠.”
한국 애니의 가능성을 봤지만, 두 감독의 마음은 왠지 복잡해 보였다. 극장·투자자에 먼저 수익을 떼어주고, 공동제작사끼리 또 나누면, ‘쥐는 돈’이 너무 적어 다음 작품 자본금을 걱정해야 하는 ‘200만 흥행감독’의 한숨과, 실사영화 연출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던 ‘독립 애니 감독’의 고민이 술잔에 녹아들었다.
“오십살 다 되도록 늘 ‘아르바이트’하는 기분이었죠. 집에 돈을 잘 갖다주지 못하니까 아직 내가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차도 없으니까 남들은 ‘환경주의자’라고 여기더군요. <암탉>이 대박났으니, 이젠 집에서 어른이 될 수 있겠구나, 회사(‘오돌또기’)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겠구나란 소박한 꿈이 있었는데…. 땅을 빌려 종자를 뿌리고 열심히 했지만, (수확한) 곡물이 내 것이 아닌 허탈감이 들더군요.”
오 감독은 “6년여간 <암탉>을 준비한 애니 제작사 인건비와 비용도 순제작비의 일부 ‘투자’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제 살 깎는 식의 희생으로 감수되다 보니 (그만큼 수익배분을 못 받는) 비애감이 크다”며 “차기작에선 애니 제작사도 현금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돼지의 왕>도 2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아 독립영화로서 흥행했지만, 손익분기점(5만명)엔 미치지 못한다.
“온라인(다운로드)·해외판매 등을 합하면 수익은 분명히 날 것 같은데, 내년 말에나 전체 수익정산이 이뤄질 것 같아요.”
연 감독은 스토리를 끌고 가는 연출력 덕에 때마침 실사영화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엄청 유혹이 됐죠. 한국 애니가 할 수 있는 (활동) 폭이 좁다 보니까. <똥파리> 양익준 감독은 ‘애니에서 보여줄 게 많지 않으냐’ 했고, <고지전> 장훈 감독은 ‘관객 성적으로만 승부하는 실사영화계에 왜 들어오려 하느냐’며 말리더군요.”
가능성과 현실의 장벽 동시에 확인
그는 관객과 만나는 통로에 대한 고민도 깊은 듯 보였다.
“(기술적으론) 1억여원으로 애니를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극장 배급만 생각하면 멍해져요. <돼지의 왕>을 보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극장을 많이 잡지 못했으니까요. 옛 영화 <우뢰매> 배급방식처럼 지역 문화회관을 순회하는 상영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죠. 요즘엔 100~300개관에 크게 개봉하는 형태가 맞는 건지, 온라인·해외판매·아이피티브이(IPTV) 등을 겨냥해 수익을 내는 것이 옳은 건지 헷갈립니다.”
임범 평론가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영상·애니산업을 키운다는 정책으로, 대학에 관련 학과도 생기고, 한국콘텐츠진흥원(2001년) 등도 생겼지만 문화산업으로 접근하면서 콘텐츠의 ‘질’이 겉돌았다”며 “<암탉>과 <돼지의 왕>이 (시나리오와 그림 등) 콘텐츠의 질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것은 중요한 의미”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그의 물음은 ‘이만큼의 성과를 흡수해서 이어나갈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란 것으로 이어졌다.
두 감독들 대답은 비슷했다. 그들은 애니를 수익창출 산업으로만 보는 인식의 전환과, 수출용 대형 글로벌 프로젝트란 ‘규모’만을 좇아 정부 지원금이 쏠리는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어떤 스토리인지보다 ‘3D 입체’라고 하면 투자하거나, 글로벌 프로젝트란 거대한 허상에 지원금을 주었죠. 글로벌 프로젝트로 30억원 정도 주고 나머지 70억원과 해외배급은 ‘니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해서 잘된 게 뭐가 있죠? 이런 기형적 구조 때문에 한국 애니의 10년 암흑이 왔던 겁니다. 내수시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데 해외를 노린다는 건 더 힘들어요. 한 작품에 30억원 투자할 거라면 5억~6억원 규모 애니 5~6편에 지원할 수 있죠. 그게 애니의 다양화를 위해선 더 낫죠.”(연 감독)
오 감독은 “애니를 영화작품이란 문화적 가치로 평가받을 때가 됐다”고 했다. “<암탉>을 티브이 시리즈로 만들자고 해서 거부했죠. 부가 수익 창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메인스텝(활동의 중심)이 (작품을 복제·재생산하는) 산업 쪽으로만 흘러가면 문화생산자 입장에선 창조적인 게 아니죠. 애니가 영화계 마이너였다가 <암탉> 등을 통해 메이저로 진입하고 있는데, 이젠 메이저 무대에서 영화의 가치로 인정받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표로 있는 ‘오돌또기’가 “한국의 ‘지브리스튜디오’(일본의 명문 애니 제작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한국이 (외국 애니메이션 주문을 받아 그리는) 오이엠(OEM) 제작 경험의 노하우가 축적돼 시나리오가 좋으면 충분히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그림 그리는 애니메이터들을 잘 조직화해서 능력을 발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획·투자·제작까지 하는 애니 전문 제작사가 앞으로 2~3개라도 더 생긴다면 (제작환경이) 달라질 겁니다.”
“애니를 산업으로만 보지 말았으면”
오 감독은 유기견을 소재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한국 애니가 비주류로 취급돼 대중과 연결고리가 차단되면서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하지 못하는 등 관객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너무 많다”며 관객의 기대를 당부했다.
연 감독도 “어떤 그림이냐에 따라 영화의 느낌이 완전 달라지는 애니의 재미를 많이 알아줬으면 한다”며 “산업이 아닌 (그림, 이야기의 정서로) 감동을 주는 애니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시상에서 3관왕을 차지한 그는 <돼지의 왕>이 내년 한국 영화계에 또다른 기쁜 소식을 전해올 것 같다고 귀띔했다. 봄에 날아들 그 비밀스러운 소식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또다른 도약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리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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